[Art] “판화 제작과정 보여줘도 미술은 여전히 마술이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작품은 일단 크기로 압도한다. 조카 엠마를 찍어낸 목판화(109.2×88.9㎝), 실크스크린 자화상(163.8×137.1㎝) 등. 자기 키만 한 얼굴에 다가가면 얼굴은 안 보이고 격자 무늬 속 동그라미들, 물감 자국만 추상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작품 옆에는 원판과 중간중간 찍어본 시험쇄들까지 주루룩 걸어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9월 25일까지 클로스(68)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린다. ‘위대한 모험, 척 클로스:과정과 협업’전이다. 미국 워싱턴주 태생의 척 클로스는 14세 때 추상 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 미니멀리즘의 거장 솔 르윗이 최고이던 시기에 미술을 배웠다. 1960년대 후반 자신과 지인들의 솜털까지 자세히 묘사한 극사실주의 회화와 사진으로 세계 미술계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72년부터 대형 판화와 유화 작업을 지속하며 미국 미술계를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클로스가 판화 기술자들과 협업해 제작한 다양한 기법의 판화 작품과 그 과정에서 만든 여러 개의 원판 등 총 144점이 나왔다.

작품이 나오는 과정보다는 결과, 작품성보다는 가격, 노력보다는 작가의 천재성이 더 부각되는 이 시대에 그는 일본 목판화, 리놀륨 판화 등 이런저런 전통적 판화 방식으로 깎고 찍기를 우직하게 반복했다.

그래서 그는 “대단한 발상이 떠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구름이 갈라져 번개가 머리를 치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한데, 그보다는 차라리 작업을 진행하는 편이 더 나아요. 작품을 만들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든요”라고 말한다. 또한 판화가인 자신을 “경험이라는 음악을 편곡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클로스는 어릴 적 난독증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안면인식장애도 있었다. 48세 때는 척추혈관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시를 기획한 테리 술탄 블러퍼 갤러리(휴스턴대 부설 미술관) 전 관장은 ‘장애극복 화가’라는 면모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을 경계했다. “미술관 청중들에게 강연하던 중 장애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척 클로스는 ‘내가 장애인이라기보다는 여기 있는 분들이 아직 장애가 없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내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고 전하며 “그는 낙천가”라고 말했다.

클로스는 어릴 적 마술에 열광했다. 마술의 온갖 속임수를 다 알고도 관객들은 늘 모자에서 토끼가 나오는 순간 숨을 죽인다.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다. 테리 술탄 전 관장은 “척 클로스 판화의 핵심은 과정과 협업이다. 이번 전시는 대작이 탄생하는 과정을 볼 수 있게 기획했다”며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드러내도 미술의 마술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휴스턴대 미술관에서 시작해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을 거쳐 12번째로 한국에 왔다. 02-737-7650.

권근영 기자

▶ 중앙일보 라이프스타일 섹션 '레인보우' 홈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