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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극 "난 개처럼 살고 싶지 않다"를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인간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난 개처럼 살고 싶지 않다』(마리아이레네 포네스 작,채윤일 연출)는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화제를모았다.비자금 사건으로 정국이 한창 어지러운때 한 군사독재국가의 군인가정을 무대로 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기대를 모을 만했다. 그러나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에 공감할 수 있는 관객이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게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극의 주인공 올란도는 육군 소령으로 첩보관계부서에서 주로 고문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는 인물이다.그는 고문을 하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그런 냉혈한이다.그를 둘러싼 세명의 여성이 있다.애정도 없이 법적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아내 레티 샤와 그에게납치돼 그의 성욕구 충족 대상으로 이용되는 고아소녀 레나.단조롭고 일상적인 가사노동에 몸서리를 치는 하녀 올림피아.권력욕에눈먼 군인 올란도가 힘으로 군림하는 권력자를 상징한다면 그에게얽매인 세 여성은 억압받고 신음하 는 약자,즉 독재국가 국민인셈이다.공포에 떨며 성폭행을 당하는 소녀 레나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라며 폭력을 휘두르는 올란도의 관계는 억압과 피억압의 극대화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작품은 부지기수의 고문사건등 과거 군사정권이 존재하던 70~80년대 우리 치욕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96년을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지나치게 도식적인 대립관계와 인물묘사는 극의설득력을 떨어뜨렸다.마치 정답이 적힌 시험지처럼 즉물적으로 펼쳐진 극은 관객이 상상력을 발휘하며 끼어들 여지 를 남겨두지 않았다.원작의 한계일까,아니면 인물묘사의 지나친 절제 탓일까.
등장인물의 표면적 묘사는 작품의 페미니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도역부족이었다.
갈수록 복잡하고 교묘해지는(?)권력구조와 성의 역학관계 가운데 놓인 관객들의 위치를 너무 단순한 잣대로 재려했기 때문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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