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 初代 정부수반 아라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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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과격한 테러리스트에서 자치정부 수반으로-.」20일 선거에서초대 팔레스타인 정부수반으로 선출된 야세르 아라파트(66)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상징이다.「사막의 불사조」「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처럼 그는40여년 동안 가시밭 길로 점철된 독립투쟁을 벌이면서 숱한 사선(死線)을 넘어왔다.
29년 이집트 카이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대공대에 입학할 때까지 특별한 정치적 야망이나 반 이스라엘 투쟁조직에 가담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이러한 그의 인생이 뒤바뀐 계기는 52년 실시된 팔레스타인학생연맹 의장선거에서 그가 의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이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열렬히 참가한 그는 쿠웨이트에서 「자유팔레스타인 건설회사」를 세워 거금을 모아 무장투쟁의 자금 을 지원했고59년엔 동료들과 함께 PLO의 모태인 「파타(FATAH)」라는 무장조직을 결성,독립운동을 본격화한다.
무장특공대를 이끌며 60년대 70여회에 걸쳐 이스라엘의 주요시설에 대한 파괴작전을 성공시켜 명성을 높였던 그는 67년 중동전땐 4백5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1만5천명에 달한 이스라엘군을 격파,팔레스타인전사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신화 로 떠오르게된다. 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68년 PLO 창설과 함께 의장직을 맡으면서부터다.
PLO가 항공기납치,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등으로 국제적인 테러조직으로 악명을 떨치면서 자연히 의장인 그에게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테러와 함께 외교에도 능했다.『나는 한손에는 권총(전쟁)을 다른 손에는 올리브가지(평화)를 들고 있다.
내손에서 올리브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그의 74년 유엔총회 연설은 유명하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그는 더이상의 테러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 80년대후반 과격파들의 압력을 물리치고대결보다는 타협을 선택,오늘날의 평화와 국가건설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 과정에서 밖으로부터는 테러리스트,안으로부터는 타협주의자라는 견딜수 없는 비난을 들어왔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않고이스라엘과 비밀협상을 진행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94년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하도록 했고 그해 7월엔 27년의 망명생 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94년엔 중동평화 진전의 공로로 라빈 전이스라엘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암살위협과 오랜 유랑생활로 독신으로 지내오던 그는 91년 62세의 노년에 자신의 여비서인 34세연하의 수하 타윌과 결혼,95년7월 딸 자흐와를 얻었다.
윤석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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