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기행>"神의 자식들" 폭스 버터필드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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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78년 3월 뉴욕 지하철에서 두번에 걸쳐 승객을 쏘아죽인윌리 보스켓은 곱상한 얼굴의 15세 흑인소년이었다.보스켓은 미성년자인 까닭으로 5년의 기술학교 수용 처분만을 받았다.무자비하고도 맹목적인 그의 범죄는 미국사회를 전율시켰 고,뉴욕을 필두로 많은 주에서 살인.강간등 특정범죄에 대해 형사 책임연령을13세까지로 낮추는 법개정을 서두르는 계기가 되었다.그래서 이법은「윌리 보스켓법」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83년12월에 풀려난 윌리 보스켓은 불과 석달후 강도미수 혐의로 다시 체포됐고,이후 교도소 안에서의 거듭된 폭력행위로 60여년의 실형을 쌓아놓기에 이르렀다.특히 여론의 각광을 받은것은 88년,몰래 만든 쇠꼬챙이로 교도소 면회실에서 교도관 한사람을 찔러 거의 죽일뻔한 일이다.재판과정에서 윌리 보스켓은 교도소의 질서에 맞서온 자신의 투쟁이 백인의 압제에 대한「흑인해방운동」의 일환이라고 선언했다.그리고 스스로를「이 체제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규정했다.
뉴욕 타임스의 폭스 버터필드 기자는 이 절규에 주목하고 윌리보스켓의 배후를 취재하러 나섰다.거기서 그는 거대한 암흑과 폭력의 역사를 만나고 한 집안의 슬픔과 좌절의 흐름을 찾아낸다.
버터필드가 7년간의 작업으로 발굴,정리해낸 한 범죄자 집안의 이야기가『신(神)의 자식들』(원제:All God's Children,Knopf刊)이다.
이야기는 윌리의 고조할아버지 아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865년 17세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노예해방을 맞은 아론은 착실한 교회집사였다.그의 아들 푸드는 아버지와 달리 자유인의 권리를 주장하고 백인의 횡포에 맞선다.21세때인 19 10년,푸드는 이유없이 흑인 소작인들에게 매질하는 지주의 손에서 채찍을 잡아채 뺏으며『이젠 네게 얻어맞을 검둥이가 없다』고 외친다.소작에서 떨려난 푸드는 건달로 지내며 인근에 악당으로 명성을 떨치다 35세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두살도 안돼 아버지를 잃은 푸드의 막내아들 제임스는 주변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으며 행동이 거친 젊은이로 자라난다.18세때 단신으로 북부로 떠나 이듬해부터 감옥신세를 지기 시작한다.그가 떠난 뒤 태어난(1941년)그의 아들 버치는 여덟살때 어머니를 따라 뉴욕으로 옮겨간다.그리고 다시 12년후,버치가 살인죄로 재판을 받고 있을때 태어난(1962년)그의 아들윌리는 평생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다.부자지간인 버치와윌리의 소년기는 판에 박은듯 같은 틀로 짜여졌다.아버지 없는 집에서 어머니의 냉대를 받으며 자란점,할렘가 길바닥에서 독기 하나로 버텨낸 점,범죄자인 아버지를 자랑거리로 여기고 자신의 모델로 삼은 점,여덟살때부터 소년법정.정신병원.소년원등 선도기관의 단골손님이 된 점.어느 시설도 이들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했다.버치가 20세때,윌리가 15세때 저지른 살인에는 몇푼의 돈밖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버치와 윌리의 마지막 공통점은 둘다 살인죄로 갇힌후 인생의 의미를 열심히 생각하게 된 점이다.자잘한 범죄속에 쳇바퀴 돌던의식이 큰 범죄와 그 재판으로부터 자극을 얻은 것일까.아니면 그나마 길거리에서보다는 안정된 감금생활 덕분에 ■■■敾■■痛■자기인식의 기회를 얻은 것일까.62년 무기형을 선고받은 후에도버치는 기구한 행적을 그린다.모범수의 길을 10년 넘게 걷다가느닷없이 탈옥,은행을 털다 다시 붙잡히고 모범수로 돌아가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학위까지 받는다.
여론의 도움으로 84년말 마침내 가석방처분을 받는다.22년만의 출옥이었다.그러나 두달만에 다시 붙잡힌다.동거하던 애인의 여섯살짜리 딸아이를 추행한 혐의였다.그리고 보름후 탈옥을 꾀하다 경찰과 대치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윌리는 78년 살인죄로 갇힌후 난생 처음 아버지 버치와 전화통화를 하고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흑인해방운동의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맹목적인 범죄성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윌리는 버치의 훈계조 편지에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느꼈다 .불편한 마음을 싣고 오가던 편지는 82년 가을로 끝났다.그러나 85년 봄 옥중에서 버치의 결말을 전해 들으며 윌리는 아버지에 대한 자랑을 되찾았다.그와 함께 자신의 숙명에 대해서도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감옥 내에서의 「노력」으로 스스로에게 50년 징역을덧붙인 것은 그후의 일이다.
버치가 몇차례 정신과 진찰에서 분열증 진단을 받은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모범수로서 그는 킹 목사 계열 민권운동의 화해정신을,탈옥수로서 그는 말콤 엑스 계열 해방운동의 저항정신을 체현했다.그리고 두 정신의 갈등속에서 숨져갔다.그의 아들 윌리는 외곬으로 말콤 엑스를 따르며 체제가 강요하는 게임을 거부한다.
민권운동과 해방운동의 갈림길은 흑인들이 전면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머물러 있는 한 언제나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노예해방은 명목상 평등과 실제 불평등 사이의 괴리를 흑인들에게 갖다주었다.성실한 노력으로 이 괴리를 좁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으로 격렬한 단절을 통해 자기들만의 별도의 세계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제임스.버치.윌리의 3대는 소년기에 개량적 노력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소작권을 버리고 지주에게 대들며 푸드가 지키려 한 자유인의 꿈이 그의 자손들에게 좌절만 안겨준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노예제도의 후유증을 극복하려는 지금까지의 미국사회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한편 보스켓 일가를 비롯한많은 흑인들이 빠져있는 질곡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한번 잘못된 역사가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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