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 부는 녹색 바람국내 베지테리언 100만 명으로 늘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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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20면

강된장에 비벼먹는 생채비빔밥, 우엉잡채, 표고(버섯)탕수 등 다양한 채식 메뉴를 개발해온 서울 경복궁역 앞 ‘에코밥상’. 이 식당은 환경운동연합과 함께 바른 먹거리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올 초복엔 삼계탕 대신 콩 두자, 두(豆)계탕 드세요.”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5월의 토요일 낮, 한국채식연합 회원 10여 명은 서울광장에서 이색적인 구호의 피켓을 들고 나왔다. 이 단체의 이원복 대표는 “광우병 공포가 확산된 이후 인터넷으로 채식 문의가 많이 들어와 가두홍보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입 회원은 5월 중순 2500명에서 6월 중순 4000명대로 늘었다고 이씨는 소개했다.

콜레스테롤과 지방 함유량이 낮거나 거의 없는 고기 대용식을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콩을 튀겨낸 후 버섯 등을 추가해 고기 질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위쪽은 콩불고기볶음, 아래는 콩가스.

채식이라고 해서 나물이나 샐러드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탕수육 대신 표고버섯 탕수’ ‘돈가스 대신 콩가스’ 등 고기를 대신해 채식으로 만든 다양한 식단이 광우병 파동 이후 돌아선 초보 채식인의 미각을 유혹한다. 맛과 모양이 여느 고기와 큰 차이가 없어 채식주의자에게 큰 인기다. 일요일인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포이동의 ‘SM 채식뷔페’가 주최한 채식인을 위한 무료요리강좌는 집에서 직접 채식요리를 해보려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뤘다.

1999년 국내 최초로 채식용 고기인 ‘콩고기’를 출시한 ‘베지푸드’에는 4월부터 가맹점 개설 문의가 몰리고 있다고 한다. 이 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문의해오는 사람 대부분 고깃집·치킨집을 운영 중인 업주들이다. 베지푸드 대표인 이승섭씨는 “콩불고기·콩가스·콩살로만(햄) 3개 품목의 매출이 최근 두 배로 늘었다”고 했다.채식 물결의 주도세력은 여성들이다. 4월 18일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결과가 발표된 후 전 연령대의 여성이 이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초기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10대 여학생, 20대 미니스커트 부대, 유모차 부대, 30~40대 주부가 차례로 가세했다.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이런 운동에 힘입어 국내 채식인은 전체 인구의 2%인 100만 명까지 늘어났다는 것이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 세 차례의 채식 물결이 있었다. 첫 번째는 2002년 구제역 파동 때 있었다. SBS TV의 신년특집 ‘잘 먹고 잘 사는 법’에서 육식의 위험성이 부각된 직후 바로 구제역 소동이 벌어졌다. 이 ‘덕분’에 채식인구는 전체의 1%(약 50만 명)대로 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2004년 초반이다. 2003년 말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의 확산으로 닭고기 소비량이 확 줄면서 1.2%(약 60만 명)로 조금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광우병 파동이 세 번째 큰 파도를 만들었다. 총채식인구는 전국 사찰인구에 생활협동조합전국연합회·한국여성민우회·한국유기농협회·한살림 등 소비조합의 일부 인원, 채식단체 소속 인원을 더해 추산한다.채식인구가 늘고는 있지만 그 기반이 탄탄한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채식모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PC통신이 발달했던 1996년. 하이텔·천리안 등을 통해서다. 10년을 갓 넘긴 수준이어서 문화운동 측면에서 초기 단계다. 더욱이 국내 채식인의 상당수는 사찰인구다.

베지푸드 이 대표는 “육식에 대한 불신이 증폭된 직후 또는 연초에 시도했다가 연말이 될수록 흐지부지되는 등 유행에 따르는 채식인이 아직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완전채식인의 비율도 다소 낮은 편이다. 국제채식연맹(IVU)이 추산한 전 세계 채식인구는 1억8000명. 이 중 완전채식인은 30%에 이른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완전채식인이 10%, 우유만 먹는 채식인이 50%, 달걀까지 먹는 채식인이 40%로 추정되고 있다. 채식인은 아니지만 생선까지는 먹는 채식인 또는 상황에 따라 곡물·채소만 먹는 반(semi)채식인이 많다. 완전채식인과 달리 우유·달걀·세미 채식인은 육식 쪽으로 돌아설 잠재력이 상대적으로 크다.

국내 채식은 대부분 건강상의 이유로 또는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시작하는 실용적 성격이 강하다. 이 때문에 건강이 회복되거나 의지가 약할 경우 채식을 할 이유는 소멸한다. 특히 우리의 회식문화는 채식인에게 너그럽지 못하다. 직장인 김보성(26·여)씨는 서울대 재학 시절 학내 ‘채식인 모임’에 들면서 윤리적 채식을 주장해 왔지만 3년 전 직장에 입사하면서 완전 채식을 포기하고 생선까지 먹는 채식인으로 돌아서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침에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지만, 회식 자리에서 젓갈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김치를 안 먹기는 눈치가 보였다”고 그는 소개했다.

동물사랑실천연합회 박소연 대표는 “현재의 채식 열풍은 동물·환경 보호에 대한 신념보다는 먹거리 안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며 “불안감이 가시면 다시 육식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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