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찌 변하든 “난 그대로야” -‘위대한 레보스키’와 ‘화이트 러시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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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07면

낙오자나 패배자를 뜻하는 ‘루저(loser)’라는 말이 낭만적 정취를 품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거꾸로 읽기’ ‘삐딱하게 보기’ ‘오랑캐로 살기’ 등등의 제목을 단 책들이 많이 나왔던 1990년대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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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와 부지런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 통념에 대한 반발일 텐데, 거기엔 경쟁사회의 약육강식 논리에 저항하려는 인본주의적인 생각도 있었을 거고, 좀 더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이길 수 있다는(안 그러면 당장 수능시험에서 떨어진다는) 실용주의적인 생각도 있었을 거다. 어쨌거나 지난 일이다.

90년대 후반 구제금융 사태 이후로 신자유주의가 급속히 밀려들어와 우리 사회에 내면화되기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루저라는 말에 더 이상 낭만은 없는 듯하다. 전엔 “넌 루저야!” 하면 “넌 삐딱해!” 또는 “넌 너무 세속적이지 못해!”라는 뜻으로 들을 여지가 있었다. 지금은 “넌 무능해!”라는 욕설로 들리지 않는가.

조엘 코언과 에단 코언 형제가 만든 98년 영화 ‘위대한 레보스키’는 루저가 주인공인, 루저의 이야기다. ‘루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루저의 이야기’다. 보통 영화에선 루저가 주인공으로 나오면 그가 어떤 일로 인해 자극을 받아 초심이 살아나고, 그래서 루저 아닌 보통 사람도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해낸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레보스키는 아무 일도 해내는 게 없다. 처지도 똑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업자로 혼자 살고, 여전히 직장은 물론 여자 얻을 노력도 안 한다. 그래 놓고 마지막에 “난 그대로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럼 그가 하는 일은? 볼링장 가서 자기처럼 대책 없는 백수 친구들과 어울려 논다. 여느 백수들처럼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 미국의 이라크 침공 같은 정치 얘기도 열심히 한다. 하지만 여느 백수들처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레보스키는 ‘평화주의자’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 자주 쓴다. 그럼 그가 마시는 술은? ‘화이트 러시안’이라는 칵테일이다.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이 칵테일을 9잔 마신다. 이쯤 되면 이 술은 캐릭터의 일부가 된다. 화이트 러시안은 러시아와는 상관이 없다. 미국인들이 보드카가 들어가고 색깔이 희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여 50년대를 전후해 마시기 시작한 칵테일이다. 재료는 보드카, 커피 리큐르, 생크림(혹은 우유), 그리고 얼음이다.

커피 리큐르는 커피를 발효시킨 게 아니라, 커피 원액을 섞은 술이다. ‘리큐르’가 술에다 허브나 과일 따위의 즙을 첨가시킨 것으로 우리로 치면 오가피주나 복분자주 같은 게 여기에 속하는 셈이다. 서양엔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커피 리큐르가 매우 많은데, 그 대명사가 ‘칼루아’다. 화이트 러시안의 레시피 중 상당수는 아예 커피 리큐르 대신 칼루아를 써넣는다. 칼루아가 그만큼 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 다시 보자. 보드카. 독주 중에서 자기 향이 가장 없고, 또 값이 싸다. 칼루아. 역시 싸고 흔하다. 그리고 우유와 얼음이다. 이만큼 쉽게 구할 재료들이 또 있을까. 만드는 방법? 어떤 레시피는 칵테일 통에 보드카·칼루아·얼음을 넣고 흔든 뒤 잔에 따르고 그 위에 크림을 따르라고 한다. 또 어떤 레시피는 보드카·칼루아에 크림까지 넣고 흔들라고 한다. 하지만 큰 차이 없다. 흔들지 않고 저어도 된다. 재료들의 분량? 자기 입맛 따라 섞어도 된다. 레보스키도 대충 섞고 저어 마신다.

화이트 러시안은 맛이 달다. 술꾼들은 단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술이 달다’고 할 때는 술이 맛있다는 뜻이지 말 그대로 달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레보스키는 맛이 단 화이트 러시안을 달게(맛있게) 마신다. 미국인들이 식사 때 커피와 우유를 마시는 걸 감안하면, 게을러터진 그가 식사 대신 커피와 우유 모두 들어간 이 술을 마시다가 그게 습관이 된 것 아닐까.

손만 뻗으면 닿는 것들을 섞어 식사 대신 마시고 취하는 효과까지 얻는다! 우리 식으로 하면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시는 셈일 텐데, 우연히도 레보스키는 마치 막걸리를 마실 때처럼 화이트 러시안의 우유 자국을 콧수염에 하얗게 남기며 마신다.

게을러터진 주인공에 걸맞지 않게 이 영화의 얼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같은 40~50년대 하드보일드 탐정물과 닮아 있다. 레보스키는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부르주아들의 탐욕이 뒤엉킨 복잡한 범죄극에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휘말려 들어간다. 거기서 레보스키가 보이는 대응은, 냉철하기 그지없는 챈들러 소설의 주인공 필립 말로와는 180도 다르다. 레보스키는 의심이 더디고, 남들이 욕해도 별 반응이 없고, 위기 상황에서도 잠을 퍼잘 만큼 낙천적이다.

그래서 영화는 작용과 반작용이 엇박자를 이루는 독특한 소동극을 만들어 가는데, 놀랍게도 영화를 보다 보면 게으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 주인공에게 속 깊은 애정이 생겨난다. 욕심 많고 약삭빠른 세상이 아무리 그를 갖고 놀아도, 그는 편안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루저일지언정 ‘위대하다’고 부르기에 손색없는 루저다.
여느 술꾼들처럼 나도 화이트 러시안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시켜도 한두 잔으로 그치게 된다. 단 걸 많이 먹기도 그렇고, 또 럼이 베이스인 칼루아가 많이 마실 게 못 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럼을 많이 마신 뒤 다음날까지 비위가 상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이내 그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

월터와 도니는 레보스키와 함께 볼링장에서 죽치는 백수 친구들이다. 도니가 죽었다. 화장한 재를 뿌리러 월터와 함께 바닷가에 갔다. 유골함을 든 월터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조사에 스스로 감동해선 유골함을 하늘을 향해 턴다. 잿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월터 뒤에 서 있던 레보스키의 몸을 하얗게 뒤덮는다.

지금도 이 장면을 생각하면 폭소가 터지면서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가고, 레보스키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백수인 채로(나도 사실상 백수다) 늘어지게 앉아서 수염에 우유 자국 남기며(나도 수염을 길렀다) 화이트 러시안을 마실 거다. 나도 이 글 보내고 늘어지게 앉아서 화이트 러시안을 마실 거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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