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지켜본 형사의 고뇌 시에 담아 ‘탈출을 꿈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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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정보통’ 안천순 경위가 30일 정년퇴임을 맞아 최근 펴낸 시집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잘 가시라/ 독재와 민주/민중과 해방/그리고/통일까지도/훌훌 떨쳐 버리고/편안히 가시라/ 다 태우지 못한 들불일랑/후인들에게 맡기고/작은 둠벙 흙탕물 속/피어나는 연꽃의 미소만을/간직한 채<시 들불·전반부>

광주 동부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인 안천순 경위(58)는 2007년 6월 작고한 민주화운동가 윤한봉 선생의 영결식장에서 이 추도시를 썼다. 안 경위는 재야인사들과 각별한 사이다. 공안기관 정보요원과는 누구도 만나질 않았던 고 윤한봉 선생도 그를 찾아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자타가 인정한 ‘재야의 정보통’이다. 그가 30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시집을 냈다.

안 경위는 일선 파출소와 형사계,정보과 형사를 지내면서 써 놓은 시 110편을 묶어 시집 ‘금남로에서 탈출을 꿈꾸다’를 26일 출간했다.

그는 “5·18을 만났던 금남로에서 많은 학생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농부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갈등과 분노,울분을 터뜨리며 탈출을 꿈꾸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탈출의 방법으로 글을 썼다”고 말한다

75년 경찰에 들어온 그는 33년 6개월의 경찰생활 중 31년 8개월을 광주의 한 복판 동부경찰서에서 근무했다.

87~99년엔 정보과 형사로 재야운동권과 시민사회단체,대학을 담당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던 그는 군부독재시절 금남로에서 5·18민주화운동 추모행사가 열릴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88년 5·18민주화운동 18주기를 앞두고 전남경찰청장과 광주시장 등 윗사람을 찾아가 “전남도청 앞에서 5월 추모행사가 열릴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설득해 관철시켰다.

91년엔 명지대생 강경대,전남대생 박승희,노동자 정상순씨 등 10명의 운구행렬을 큰 불상사 없이 망월동까지 안내했다. 그해 그는 틈틈이 써왔던 시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는 “경찰공무원으로서 당시 너무 편협한 시각에 갇혀있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위 ‘분신정국’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문병란(전 조선대 교수)시인은 작품해설에서 “5·18내란음모 주동세력에 해당한 나 같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그 동정을 살피는 경찰임무를 수행하다가 아주 수준 높은 저항시 사회시를 쓰는 시인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본다”고 썼다. 이어 “이것이 광주가 안고 있는 특징이요,모순이요,고뇌다”고 강조했다.

문 시인은 “진보와 보수,악과 선,그 분탕치는 갈등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어느 한 편에 서서 벅찬 삶을 책임지면서 느낀 그 숱한 맘 고생 너무도 말 많은 세상을 몇 줄의 시로 줄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호수 속 잔물결의 파문 속에서 첫 사랑의 수줍던 몸짓과 현란한 춤사위를 기억해 내는’(시 첫사랑 중에서) 그의 맑은 서정에 대한 기대를 표시했다.

안 경위는 “정년퇴임의 쓸씀함 같은 것을 벗어버리기 위해 시집 출판을 결심했다”며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남은 삶이 빈 껍데기가 되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집엔 화백 장현우,허임석,강연균,이영식,우제길씨 등의 표지화·삽화도 담았다. 30일 오후 6시30분 동명동 오페라하우스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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