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경제 윽박지르기와 다독거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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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89년 전세값이 크게 뛰자 정부는 그해 연말 매우 정의로운 정책결정을 내린 바 있다.주택임대차보호법을 고쳐 전세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린 조치였다.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그같은 조치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다들 기 억하는대로 집주인들은 2년치의 전세값 인상을 한꺼번에 요구했고,결국 정부의 조치는 세입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더한 고통을 가져다줬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공무원이나 정치가들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지난 79년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시 당국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주택임대료 통제법을 시행했다.집 임자들이 주택을 없애거나 용도를 바꾸려면 의무적으로 새 임대주택을 한 채 더 짓도록 해 주택공급의 감소를 막으려는 제도였다.
결과는 부동산가격이 희한하게 바뀐 것이었다고 한다.임대용 아파트 한 채가 고작 20만달러에 나왔는가 하면 바로 옆의 같은규모 공터는 60만달러를 호가하는 식이었다.임대아파트값이 내려갔으니 되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결국 임대 아파트는 별로돌보는 이 없이 버려지다시피 했고,대부분 공터에는 서민들이 살기 어려운 값비싼 집들이 들어서 도시는 파괴됐다고 한다.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이승환 역.김영사 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같은 사례들 때문에 경제를 다룰 때 흔히 인용되는 것이 이솝 우화다.태양과 폭풍이 길가는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 내기를 했는데 결국 태양이 이겼고,폭풍은 나그네로 하여금 더욱 옷깃을여미게 만들고 말았다는 줄거리다.
경제학자들은 이같은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경제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도덕적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하곤 하는데 요즘의 국내 상황이 바로 그같은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작게는 규제완화에서부터 크게는 경제력집중 해소에 이르기까지 ,좁게는 개개인의 시각에서부터 넓게는 정국 운영에 이르기까지 합리적 경제마인드가 체질화돼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약자 보호의 명분을 내건 결정이었든,이익집단의 로비임을 감춘결정이었든 대부분의 경제규제는 소수를 위해 다수가 대가를 치르는 결과를 낳는다.규제완화를 해야만 하는 이유다.
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며 관료들이 대기업의 신규업종 진출을 막았던 결과는 다들 보다시피 막대한 비자금이었다.그러니 정부는기업의 규모나 업종에 쓸데없이 신경쓰지 말고 계열사간 부당한 내부거래등을 막아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시키는데 힘을 기울였어야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비자금 사건의 뒤처리과정이나 앞으로의 정국운영은 더욱 세심한경제 마인드를 필요로 한다.새 경제팀이 들어서며 따라붙은 말이「경제 다독거리기」였다.그러나 비자금 재판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앞을 내다보며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기업 환경」을 경제팀이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 기업인은 없을 것이다.
행정규제든,정치 권력이든,법원의 판결이든 경제를 단순한 법이나 도덕률로 윽박지르면 그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난다는 탄탄한 경제 마인드가 사회 곳곳에 배어 있어야만 「예측 가능한 기업 환경」은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다.
최근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대법원은 최근 부도기업의 근로자 퇴직금 지급이 은행의 담보권 행사보다 우선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그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소기업이나 근로자들에게새로운 문제를 안겨주었다.은행으로부터 퇴직금에 상당하는 더 많은 담보를 요구받은 기업들은 자금난에 빠졌고,심지어 공동담보를잡은 2개 은행이 서로 담보권 행사를 미루는 바람에 퇴직금 지급이 마냥 늦춰지고 있는 사례까지 생겨났다.세입자를 보호한다던정부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 다.
경제는 윽박질러 될 일이 아니다.경제 마인드가 없는 행정.정치.사법은 자칫 사회의 위협이 될 수 있다.
(경제1부장) 김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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