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힌 법치는 대통령의 배임” … ‘욕먹는 리더십’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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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4월 말 미국산 쇠고기 파문에서 비롯된 혼란은 그 사이 1987년 이후 최대 규모라는 촛불집회, 시위 군중의 청와대 진출 시도, 경찰과의 충돌과 대통령의 퇴진 요구란 어지러운 잔재를 남겼다. 출범한 지 갓 100여 일 지난 정부로선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대선 당시 1100만 표 득표란 이 대통령의 화려한 기억도 퇴색됐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고작 20%대를 넘나들 뿐이다.

하지만 근래 “터널 끝의 빛이 보인다”는 얘기도 나온다. 촛불집회 정국이 어느 정도 진정 기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 사과하고 청와대의 전면쇄신에 나서는가 하면, 미국과의 재협상에 준하는 추가협상을 통해 30개월령 이하의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결정하는 등 대응에 나서면서다.

그렇다고 이 대통령의 고난이 끝난 건 아니다. 그는 국민의 요구에 사실상 ‘백기(白旗)’를 들었다. 이 대통령의 리더십은 크게 상처를 입었고 나라의 체통도 말이 아니게 됐다. 국정을 주도해 나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의 앞엔 4년8개월이 기다리고 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다.

①“법치가 안 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경희대 정진영 교수는 “결국 보수 정권이 5년간 해야 할 일은 법치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영삼 정부 때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씨도 “대한민국의 정당성이 짓밟아지도록 두는 건 대통령으로서 배임”이라며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통령으로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이 법치”라며 “법치가 안 되면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공권력을 다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실제 촛불집회 현장에서 공권력이 내동댕이쳐진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공권력이 권위의 대상이 아닌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최근엔 촛불집회가 일부 이익집단의 투쟁의 장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여전히 공권력이 소극적인 대응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

②“공기업 개혁 등 대통령 과제는 추진하라”=여권이 최근 공기업 민영화 등 국민적 호응도가 있던 이명박식 개혁 프로그램조차 논란이 된다는 이유로 후순위로 미루려는 움직임에 대해 적잖은 비판이 나온다.

연세대 김성호 교수는 “대선 공약의 큰 근간과 줄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고 말했다. 단국대 가상준 교수도 “공기업 민영화 등 국민이 공감하는 정책도 많다”며 “이런 부분까지 안 한다는 식으로 가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두 가지 정책에서부터 성과를 내다 보면 결국 국민적 호응도도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이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 걸 감안, 이 대통령은 ‘내가 이걸 하겠다’고 정책 과제의 전면에 나설 게 아니라 ‘우리가 이걸 안 하면 죽는다’는 식으로 가치를 설득하는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김성호 교수는 “좋은 민주주의에선 대통령의 인기(popularity)로 포퓰리즘을 통제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 포퓰리즘으로 만회하고픈 유혹을 받게 된다”며 “결국 초심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원종 전 수석은 “자신을 500만 표 차로 선택해 준 국민 다수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을 잃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③“소통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라”=이번 사태의 본질은 국민과의 소통 부족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진정성을 가지고 국민에게 다가가면 국민은 설득된다”(김성호 교수)는 것이다.

정진영 교수는 “(국민 사이에서)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적이라고 과장 해석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명박 정부가 오해를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국민은 자유주의적이고 다원화돼 있는데 이 대통령은 권위주의적이거나 군림하려는 듯 보이는 게 여전히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여권에선 “한나라당, 또 양으로 음으로 이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던 사람들도 우리 사회의 리더십과 원칙을 되세우는 데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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