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탈라궁 꼭대기엔 오성홍기가 57년간 펄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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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2일 오전 티베트(중국명 시짱·西藏)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포탈라궁(布達拉宮)에서 가장 높은 13층 옥상. ‘관세음 보살이 사는 곳’이란 뜻의 이 궁전은 라싸(拉薩) 시내 평균 고도(3600m)에 다시 117m를 더해야 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산소가 희박해 궁전 계단 하나를 오르는 데도 숨이 턱밑에 찰 정도였다. 정상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라싸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달라이 라마가 집정하던 백궁(白宮)도, 그가 종교 행사를 주재하던 홍궁(紅宮)도 아니었다. 강렬한 붉은 빛을 내뿜으며 포탈라궁 정상의 심장부에 꽂힌 중국 국기 오성홍기(五星紅旗)였다.

1951년 라싸를 무력 점령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상징물인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를 끌어내리고 이곳에 점령군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로부터 57년 만에 중국은 라싸에서 베이징(北京)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를 강행했다. ‘티베트는 중국 땅’이란 주장을 만천하에 선전하기 위해서다.

중국 티베트 자치구 수도인 라싸(拉薩)의 포탈라궁 정상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매달려 있다(점선 안). 포탈라궁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 달라이라마의 겨울 궁전이다. 티베트 전통 건축의 걸작으로 꼽혀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라싸 AFP=연합뉴스]

포탈라궁 정상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포탈라광장이 내려다 보였다. 광장에 설치된 대형 국기 게양대에 또 하나의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국기 게양대 남쪽 100m 지점에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을 기념해 세운 ‘시짱 평화해방 기념비’가 서 있었다. 마치 베이징의 자금성·천안문광장·인민영웅기념탑의 공간 배치를 연상케 했다.

평균 해발 4000m가 넘는 칭짱(靑藏)고원 지대에 통일 왕조가 처음 등장한 것은 641년 쑹짠간부(松贊干布)가 토번(吐蕃)을 건국하면서다. 토번을 달래기 위해 당 태종이 딸 문성(文成)공주를 쑹짠간부에게 헌상할 정도로 당시는 티베트의 국력이 매우 강했다. 당나라는 불교 등 다양한 문물을 토번에 이전해 주면서 평화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돌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집권한 신중국은 티베트를 중국 땅으로 편입시키고 동화 정책을 실시해 왔다. 당나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티베트에 불교를 전수했다면, 중국은 2006년 7월 개통한 칭짱(靑藏)철도를 통해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티베트에 급속히 이식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서부대개발 정책으로 티베트를 경제적·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면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통치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목적에 따라 티베트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는 지금 중앙 정부의 지원 아래 국가급 경제기술 개발구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적잖은 티베트인들은 중국 정부의 이런 방식에 회의적이다. 중국 정부가 개발 과정에서 쓰촨(四川)·허난(河南) 등지의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바람에 티베트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싸 시내에는 한족들이 운영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이 즐비하고, 이들이 라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3월 14일 유혈 시위 와중에 티베트인들이 한족의 상점을 집중 공격한 것도 한족의 티베트 경제 잠식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물질보다 정신적 가치를 숭상하는 티베트의 전통과 미덕이 경제적 풍요를 더 중시하는 한족의 세속주의 앞에서 흔들리는 현실도 티베트인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한 티베트인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라고 하지만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개발 논리가 득세하면서 천혜의 티베트 자연 환경도 빠르게 파괴되고 있다.

티베트 자치구 정부는 이런 불안감을 무마하기 위해 요즘 한족이 주도하는 중국과 티베트가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는 ‘문화 공정’을 진행 중이다. 티베트의 전통 공연예술 형식 속에 중국 정부의 조화사회론을 녹여 넣은 문예 작품 ‘길 위의 행복(幸福在路上)’을 창작해 공연하는 것도 이런 취지다.

중국 정부는 올림픽 성화 봉송을 계기로 티베트 통치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장칭리(張慶黎)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는 21일 “베이징과 라싸를 하나로 연결하자. 오성홍기는 티베트 하늘 아래에서 영원히 휘날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자치구 정부는 시민보다 더 많은 무장 경찰을 동원하고서야 성화봉송을 성사시켰다. 유혈 시위 발생 100일을 맞아 당시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티베트인들은 장 서기의 말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좀 더 아우를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라싸=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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