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파일>"개같은 날의 오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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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개봉당시 워낙 화제가 됐고 좋은 평을 많이 받은 작품이라 새삼 말하기가 쉽지 않다.더욱이 이 난은 가능한 한 극장 미개봉작중 좋은 작품을 골라 평하는 자리이기에 『개같은 날의 오후』를 쓰려는데는 다소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그러나 지난해 발표된우리 영화중 가장 가능성을 보인 것이 『내일로 흐르는 강』이고가장 빼어난 영화가 『개같은 날의 오후』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비디오 출시를 계기로 무리가 되더라도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개같은 날의 오후』라는 자학적인 제목을 처음 접하고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시드니 루멧의 재수 없는 갱 얘기 『뜨거운 오후』를 떠올렸는데 그런 연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이 두 작품의 밑바닥 인생,그들의 어긋나기만 하 는 꿈과 좌절은 『개같은…』에도 그대로 이어지지만 신세 한탄으로 끝나지 않고 건강하게 마무리돼 산뜻하다.
우리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언제나 눈물을 짜거나 남자 기죽이는커리어우먼이라는 극단의 부정적 이미지뿐이었는데 『개같은…』의 여자들은 원색적이고 극악스럽지만 남편 양말과 아이 밥도 챙기는「살아있는」 여자들이다.
이 영화의 가장 성공적인 요소는 개개 인물의 성격 묘사가 빼어나다는 점이다.더이상 칭찬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송옥숙이 연기한 영이 엄마에서부터 어리숙하게 히죽거리는 진압대장의 부하까지 그렇게 사랑스럽고 생생할 수가 없다.특히 인상 적인 배역 묘사는 게이.유부남과 바람피우는 과부.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청년에게 던져준 사과,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벤치에 덩그러니 버려진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이의 모습.게이의 심정을 이 두 장면만으로 다 그려낸다.『바람피우는 남편이라도 있지』라는 한마디로 표현되는 과부 의 심사등 20여명의 출연자 성격을 구질구질한 설명대신 명쾌하게 처리했다.땀에 젖은 러닝셔츠,번들거리는 얼굴같은 사소한 부분부터 카메라가 들어오고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인물에서 인물로 연결되는등 장점이 워낙 많아 경찰이 나흘간이나 진 압을 않고 지켜본다는 설정이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다.스필버그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컴퓨터 특수효과를 시도한다거나 한국판 『다이하드』를 꿈꾸며 액션물에 도전하는 것을 나무랄 수야 없지만,자신있는 작은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임희숙의 옛날 노래를 다시 듣게 만든 『개같은 날의 오후』를 우리 영화를 무시해온 모든 분들에게 권한다.
(비디오 평론가) 옥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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