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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섬소녀’의 하버드 1년 ①너무나 다양한 공부벌레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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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22면

머나먼 나라 미국의 낯선 도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 하버드 캠퍼스에서의 1년 생활이 끝나면서 이제야 조금 여유가 허락된다. ‘하버드’가 무엇인가, 나에게 하버드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수학 전공자가 해외봉사 위해 아프리카어 배우기도

몇 달 전 친한 선배 언니가 하버드 여름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하버드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뭘까요.”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언니는 “다양성”이라고 한마디했다고 한다. 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생 기숙사 배정이 확정된 날 학생들은 숙소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풍선 인형을 만들어 경쟁적으로 자축연을 벌인다. 하버드에는 시인 T S 엘리엇 등 하버드 출신의 이름을 딴 기숙사가 12개 있다.

지독한 ‘공부 벌레들’로, 공부에 대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범생이들’. 그러나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은 너무나 다양해 공부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학생들은 피부 색부터 공부하는 습관까지 너무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다름’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의사 지망생이 기자로 맹활약
기숙사 같은 방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스테파니라는 친구는 일 년째 스와힐리어라는 아프리카어 수업을 들었다. 스와힐리어라니,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언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한 친구가 왜 아프리카어 수업을 들을까 의아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꿈이 한비야씨로 인해 잘 알려진 구호단체 ‘월드비전’에서 일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평소 자원봉사를 열심히 하던 친구이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을 위해 선(善)을 베풀겠다는 스테파니의 꿈이 나를 따뜻하게 한다.

스테파니는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에 입학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아프리카어 수업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명문대생이 아프리카어 수업을 듣는다면 부모님들의 반응은 어떨까?

하버드 학생들이 하버드의 상징인 진홍색의 단체티를 맞춰 입고 하버드-브라운대 미식축구전을 응원하고 있다.

같은 거실을 쓰는 첼시라는 친구는 의사가 될 생각에 생물학 수업을 수강했지만 흥미를 잃고 요즘은 글을 쓰는 것에 빠져 있다. ‘하버드 크림슨’이라는 교내 잡지의 기자로 캠퍼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소소한 사건들을 취재하기에 바쁘다. 학기 초 생물학 시험 성적이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아 좌절했던 그녀를 떠올리면, 열정 가득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다.

“동아리 활동하려면 잠 줄여야 ”
다양성이 빛을 발하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동아리 활동에서다. 지난겨울 하버드 동문이자,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가 학교에서 공연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지막한 첼로의 선율을 어지간히 좋아하는지라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입생 담당 사무실에서 3명의 학생에게 VIP 좌석 티켓을 나눠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운 좋은 3명의 신입생 중에 내가 뽑힐 줄이야. 덕분에 2m가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혼신을 다하는 요요마의 연주를 접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기숙사의 친구를 만나 침을 튀기며 ‘행운’을 자랑했다. “나 요요마 공연 티켓 당첨돼서 방금 보고 왔어!” “어, 요요마? … ” 순간 나는 친구의 건조한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그 친구의 다음 말이 내겐 충격이었다. “예전에 동아리 활동하며 요요마와 같이 몇 번 협연했거든.”

하버드에서 1년을 보낸 지금, 이런 말을 듣는 게 이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공부도 잘하는 친구들이 악기 연주부터 스포츠까지 못 하는 게 없고, 그중에는 취미를 넘어 전문가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이런저런 다양한 능력을 가진 친구들 덕분에 캠퍼스에서는 콘서트며, 공연이며, 동아리 전시회가 쉴 새 없이 열린다. 공연 동아리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국제학생들의 나라별 동아리, 잡지나 토론 클럽도 활발하다. 욕심을 부려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려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 언젠가 한 친구는 “동아리 하나 더 하는 건, 잠을 한 시간 덜 자는 걸 의미해. 결국 잠이냐 동아리냐의 문제지”라고 말했다.

현재 내가 몸담은 ‘Harvard International Review’라는 국제관계 잡지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같은 저명인사들이 구독하고 있다. 학생들이 쓰는 기사도 있지만 주로 학생의 청탁으로 교수님이나 고위 관료가 글을 쓰고, 그 글을 학생들이 고쳐 잡지로 출판한다. 동아리실에 가면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한 재미있는 표어가 많다. ‘Edit Ban Ki Moon(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원고를 고쳐라)’ ‘Talk with Clinton(클린턴 전 대통령과 이야기하라)’.

현재 하버드 학부에는 한국 유학생 모임(Korean International Student Association)이 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영어보다 한국말이 편하고, 삼겹살에 소주를 기울이는 정 많은 문화를 좋아하는 한국 학생들의 모임으로 회원은 30명 정도다. 이들은 여름 방학 때 모국에서 ‘흑기사 여름학교’를 열고 청소년복지회관에서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친다. 학기 중에는 ‘H Camp’란 이름으로 한 달에 두 번씩 보스턴에 있는 한국인 입양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하버드 동상 만지지 마세요”
하버드 학생들은 공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색다른 방법으로 해소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프리멀 스크림(Primal Scream)’ 행사다. 겨울 기말고사가 시작하는 날 0시 종이 울리는 순간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수백 명의 학생이 소리를 지르며 캠퍼스를 마구 뛰어다닌다. 기말고사 준비로 힘들었던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사로, 하버드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버드 캠퍼스 내 도도히 흐르는 찰스 강이 불타는 종이배로 가득 찬 날도 잊을 수 없다. 2학년 기숙사 배정 결과가 나오기 전날 밤(소설 『해리포터』에서처럼 기숙사마다 이름이 있고, 기숙사별로 자부심이 대단하다), 배정받고 싶은 기숙사 앞에서 보드카를 한잔 들이켜고, 기숙사 이름을 종이배에 적은 뒤 불에 태워 찰스 강에 띄우는 의식이다. 이렇게 하면 원하는 기숙사에 배정된다는 소문에 따라 1000명이 넘는 신입생이 술에 취한 채 찰스 강에 종이배를 띄웠다.

여기서 하버드와 관련된 비밀 하나를 살짝 공개한다. 하버드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캠퍼스 중앙에 있는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을 찾아 발을 만지고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발을 만지면 자녀들이 하버드에 합격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발을 만지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하버드대생이 졸업하기 전 해야 할 세 가지 일 중 하나가 이 동상에 소변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생은 공부에 찌든 생활의 활력소로 이 같은 ‘일탈 행위’를 즐긴다. SAT(미국 수능시험), AP(선학점이수제), 일정 수준 이상의 내신 성적 등이 명문대 합격을 위한 전부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만난 하버드대생은 너무나 다양했다.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캠퍼스의 분위기, 그것이 세계 최고의 대학 타이틀을 유지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