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쌓아둔 돈' 넘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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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기업이 회사 내부에 쌓아두는 잉여금이 크게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잉여금(자본잉여금+이익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유보율도 급격히 증가했다. 유보율은 기업의 자금 여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 수치가 높으면 통상 재무구조가 안정된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또 무상증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 투자자들이 눈여겨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투자나 배당에 인색한 기업이 지나치게 유보를 많이 하면 주가수익률이 하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유보율 수직 상승=증권거래소가 475개 12월 결산 상장법인의 유보율(2003년 말 기준)을 조사한 결과 해당 기업의 평균 유보율은 502.1%로 1년 전에 비해 26.6%포인트가 늘어났다. 지난해 거래소에 상장된 제조업의 당기순이익이 6.5% 늘어나는 데 그친 것을 감안하면 유보율이 엄청나게 많이 증가한 것이다.

기업별로는 태광산업의 유보율이 무려 2만3953%에 달했으며, SK텔레콤.롯데제과.롯데칠성음료 등이 뒤를 이었다. 유보율 증가폭은 롯데칠성음료.롯데제과.금강고려화학(KCC), 유보금액은 한국전력.삼성전자.포스코.현대자동차 순이었다.

크레모컨설팅코리아의 이정조 사장은 "기업이 장사를 잘한 것 이외에 금리하락에 따른 이자비용 감소와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서 관련 비용이 크게 줄어든 것이 영향을 미쳤다"라고 분석했다. 금융감독원 유재규 회계제도 실장은 "현금자산이 늘어난 기업들이 각종 유가증권에 많이 투자하면서 유가증권의 평가이익이 늘고, 자회사에 투자한 지분에서도 평가이익이 발생한 것도 유보율 증가에 한몫했다"고 평가했다.

또 지난해 기업들이 9조원에 가까운 자사주를 사들인 것도 유보율이 크게 증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은 대개 시가나 시가보다 낮은 금액으로 자사주를 사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지난해 주가상승으로 자사주 평가이익을 많이 냈다는 것이다.

◆너무 높아도 문제=유보율이 높다고 현금자산이 많다거나 그 기업이 투자에 게을리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게 회계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장법률사무소의 조용호 회계사는 "유보율을 계산하는데 활용되는 자본 또는 이익 잉여금은 대차대조표의 관련 계정을 합한 것에 불과하다"며 "따라서 이를 통해 기업이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거나 투자보다는 이익을 쌓아두는데 급급하다고 결론짓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당이 높지 않거나 투자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기업이 유보율을 지나치게 높게 가져가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삼성증권 임춘수 리서치센터장은 "유보율이 높아지면 자기자본을 당기순이익으로 나눈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떨어지고, 그에 따라 주가수익률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며 "적정한 투자활동 없이 무조건 유보율을 높이는 게 기업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채비율이 낮아야만 좋은 회사인 것처럼 정부나 기업들이 인식하게 된 것도 유보율 증가에 한몫했다"며 "그러나 기업 자금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비용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유보금액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주가 측면에서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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