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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총선에 사라진 '원전센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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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선거 열풍이 불기 전부터 우리들은 까마득한 일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선거가 끝나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전수거물관리시설(원전센터) 부지에 관한 한 정치권도 국민도 이토록 건망증이 심하다. 국제 유가가 계속 치솟아 에너지 문제가 경제사회적 갈등 요인이 되고 있는데도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둔감증을 치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력 요금이나 석유류 가격을 대폭 인상해 모두가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칫 나라가 거덜날지도 모를 그런 모험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정말 큰일이다. 이번 총선에서 모든 정당이 원전센터 부지 문제를 피해가고 있다. 표를 깎아먹는 일이니 가타부타 하지 않는 게 제일의 전략처럼 보인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니 설령 열린우리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들 이 문제를 올해 안에 확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총선이 끝났다고 해도 해당 지역주민이나 환경.반핵단체의 저항을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일에 자신이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이 여당을 견제하면서 정책 경쟁을 할 수 있는 의석을 차지한들 기대할 것이 없다. 과거의 잘못이 첩첩이 쌓인 탓에 방사성 폐기물 처리 문제에 대해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집이나 빌딩을 세웠는데 화장실이 없다면 이건 건축물이 아니다. 공장을 지으면 으레 쓰레기 처리장을 마련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에는 간이 폐기물 처리장밖에 없다. 전체 전력의 40%를 공급하는 원자력발전소에 제대로 된 폐기물 처리장이 없으니 간이화장실에 의존하는 건물이요, 쓰레기장 없는 공장이나 다름없다. 전력값이 싸고 원료공급이 안정적인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어 가동하면서도 지난 18년 동안 폐기물 관리시설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지금 세대가 풍요롭게 값싼 전력을 쓰고 폐기물 처리는 후대에 넘기는 꼴이 됐으니 이거야말로 무책임의 극치다. 20~30대 젊은이들이 원자력 발전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한 그들도 무관심의 실책을 져야 한다.

각 정당은 참으로 교묘하게 골치아픈 선거 쟁점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각 원자력발전소의 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은 포화상태로 다가간다. 건물로 치면 더는 간이화장실을 지을 여지가 없는데 화장실 사용자는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프랑스.일본 등 30여개국은 정치권이 국민을 설득해 가면서 70여개의 원전센터를 이미 갖추었다. 우리는 현 정부나 과거 정권의 실책을 따질 여유가 없다. 상호 비방전이 가열될수록 부지 대상 지역 주민들에게 핵에 대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왜곡된 정보만 흘러들어가고 있다. 정치권이 미적미적할수록 원전센터 건설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더욱 눈덩이처럼 커진다.

정부는 4년 전 원전센터 부지 선정을 위한 유치 공고를 냈으나 실패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지난해의 유치 공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안사태가 말해주듯 우리는 이미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나 학습효과가 별로 없다.

정부가 또다시 지난 1월 유치 공고를 냈으나 4월 첫주를 맞은 지금까지 유치 청원을 낸 후보지가 없다. 다급해진 한국수력원자력㈜ 간부들이 동해안과 서해안 후보지역을 돌고돌며 획기적인 지역개발 투자와 연계하는 정부 계획을 설명하기에 바쁘다. 그런데도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정치 계절에 원전센터 문제는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또 다른 시련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