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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못믿을 통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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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금강산 치마바위에는 한글로 '천출명장 김정일'이란 대형 글씨가 쓰여 있다. '하늘이 낳은(天出) 장수'란 뜻이다. 2002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갑을 맞아 남측 방문객을 겨냥해 급히 새겼다. 한 글자가 가로 25m, 세로 34m에 이르는 문구를 보면서 "무슨 뜻이냐"고 궁금해 하는 남측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씨가 사단이 돼 9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중단됐다. 다름 아닌 통일부 간부가 지난 2일 금강산 오찬 상봉장에서 북측 관계자에게 농담이랍시고 '천민 출신(賤出)'이라는 해석을 쏟아낸 것이다.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북측은 상을 박차고 돌아섰다. 사과하러 찾아간 당국자는 문전박대당했다. 밤샘 진통 끝에 3일 오전 정부는 북측에 사과장을 써줬다.

북측은 문제 간부를 억류하겠다고 위협하고 금강산을 떠나오는 남측 방송 취재진의 녹화 테이프까지 압수하는 횡포를 부렸다. 당국은 항의도 못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북측 가족 101명과 이들을 만나러 간 486명의 남측 상봉단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다려온 부모.형제를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게 되자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도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는 사태를 숨겼다. 고령 이산가족을 두시간 넘게 버스에 방치하면서 "남북 간에 작은 오해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기자의 확인 요청에도 통일부는 "발언 당사자가 정부 쪽은 아니다"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은근히 한적 요원의 발언으로 비치길 바란 눈치다. 3일 본지가 보도하고 나서야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뒤늦게 사과했다.

金위원장에 대한 비판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누구보다 북한 체제를 잘 알고 있을 통일부 간부가 상식 밖의 돌출행동을 해서 어쩌자는 건가. 눈물로 돌아선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누가 달래줄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통일부가 어떻게 이산가족과 기업인에게 방북 교육을 하며, 화해.협력의 선봉에 설지 의문이다. 철저한 재발 방지책을 짜 환골탈태하는 통일부의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이영종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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