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쇠고기 미봉책’국민 감정만 자극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호 06면

정운천

“그때는 내가 없었던 때라서 일일이 보지 못했다.”

지난달 7일 국회 쇠고기 청문회장.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지난해 마련한 한·미 쇠고기 협상 지침을 읽어 봤느냐”는 조경태(통합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정 장관이 이전 지침과는 다르게 협상을 끝내 놓고도 그 차이를 모른다고 고백한 것이다. “쇠고기 협상이 ‘행정협정’인가 ‘조약’인가”라는 질문엔 엉뚱하게도 “위생협정”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날 정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빗발치는 질문에 “국제적·과학적 기준에 의해 협상이 이뤄졌다”는 말만 반복했다. 덕분에 얻은 별명이 ‘앵무새 장관’.

정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지게 한 인물로 낙인 찍혔다. 농식품부가 이번 협상의 주무 부처였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협상을 끝낸 뒤에도 잇따른 미봉책으로 국민 반발을 확산시켰다.

우선 협상 과정에서 그는 한국 농업정책의 수장으로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평이다.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려는 외교통상부나 청와대의 방침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녔지, 농업인의 반발이나 국민 감정 문제를 내세워 신중론을 펴지 못했다.

오히려 협상이 진행 중이던 4월 14일 축산 농민단체와의 간담회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은 한·미 정상회담의 사전 실무회담 성격이 강하다”고 말해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국민 감정을 자극했다.

협상 전에 전문가 협의나 관련 단체와의 논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남호경 전국한우협회장은 “우리도 30개월 이하 갈비가 들어오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며 “주무 장관으로서 30개월 이상 쇠고기 및 내장 수입과 검역 주권 양보 등은 막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축산협회가 ‘환상적’이라고 평가할 만큼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협상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협상 결과 발표 후 그가 보여 준 모습도 낙제점이었다. 청문회에서의 잇따른 말실수는 물론이고 ‘미국 내 광우병 발생 시 수입 금지’ 등 실효성 없는 정책으로 국민 감정을 자극했다.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한 미 육류 수출업계와 국내 수입업자의 수출입 금지 자율 결의 방침은 정부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 결국 정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야 3당의 해임안 공세를 받았다. 표결 끝에 해임안은 부결됐지만 7일 내각 일괄 사표 제출로 해임 대상 첫 번째로 꼽히는 신세가 됐다.

장관 취임 전 그는 농업계의 스타 CEO였다. 수입 키위의 공세에 맞서 국산 키위를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시킨 신화적 인물로 농업 부처 사상 첫 CEO 출신 장관의 영예를 안았다. 그가 농식품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내건 목표도 ‘돈 버는 농업을 만들겠다’는 것. 하지만 통상과 정치 이슈 대응 능력 부재로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일부에선 정 장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경제 회복의 디딤돌로 삼으려는 이명박 정부의 희생양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한·미 FTA의 걸림돌인 쇠고기 협상에서 대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협상 타결 수습 과정에서 보였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장은 “정 장관은 국민이 뭘 문제 삼고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에 대한 철학 없이 눈치 보고 몸 사리는 모습만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정 장관이 그만둔다 해도 신임 농식품부 장관의 앞길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현재 진행 중인 추가 협상이 성난 민심을 달랠 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 쉽지 않아서다. 쇠고기 협상뿐만이 아니다. 시장 개방 시대를 맞아 한국 농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정부 지원에 기대온 농민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상당한 고통이 뒤따를 구조조정 과정을 헤쳐 나갈 역량이 필요하다.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이헌목 농업정책소장은 “정부가 독단적으로 판단해 결정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며 “신뢰받는 전문가 집단이나 농민 대표단과 긴밀히 협조해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모아 정책을 결정하고 밀어붙여선 안 된다는 얘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