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통령 사이 국회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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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파문으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6·10 항쟁 이후 21년 만의 대규모 집회라던 6·10 촛불집회도 종착역이 되진 못한 분위기다. 여전히 시민들은 “재협상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촛불을 들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 집회는 2008년 대한민국 사회와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과거 민주화나 노사관계, 효순·미선양 사건, 이라크 파병 같은 이념의 요소가 깃든 거대 담론 대신 ‘쇠고기’라는 소프트 이슈가 광장의 화두가 됐다. 집회는 축제고, 유희며, 패션이 됐다. 깨진 보도블록이나 화염병 대신 촛불과 웹 2.0, 유모차가 등장했다. 10대부터 주부·노인까지 연령·계층도 다양했다.

정치권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깊은 성찰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과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냐의 문제다.

①“국회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은 정치인들에게 “국회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거부당한 것이다. 그래서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11일 “촛불집회는 국민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민의를 최우선시해 달라는 민심의 함성”이라고 규정했다.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국민이 촛불을 들지 않아도 되게끔 해달라는 야당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제대로 못했다”고 자성론을 폈다.

“아스팔트 위에 국민과 대통령이 대치하고 그 중간지대, 즉 대의정치는 사라졌다”(한나라당 안형환),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눈높이에 철저히 맞추지 않으면 국회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민주당 강기정)는 진단도 나왔다.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는 “정치권이 제 역할을 못하니 대중이 스스로 괴리를 메워 나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국민과의 소통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다. 한나라당 권영진 의원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소통 체계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겠다”며 “하루 빨리 국회가 정상화되고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할 수 있어야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②“식탁 위 문제를 가벼이 여겼다”=미국산 쇠고기란 먹거리 이슈는 휘발성이 강했다.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이른바 소프트 이슈였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무섭게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온·오프라인상의 ‘아고라’(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광장)에선 정보와 감정의 공유가 이뤄졌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촛불을 든 이유다.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식탁 위의 문제를 고정관념에 빠진 정권이나 정치권이 가볍게 여긴 게 아닌가”라며 “우리가 쉽게 생각했던 문제에 다 함께 분노할 수 있다는 데 무섭다는 느낌이 든다”고 토로했다. 중앙대 장훈 교수도 “미국산 쇠고기란 생활정치 문제가 촛불집회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은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일수록 위정자가 잘 관리하지 못한다면 촛불집회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③“‘나를 따르라’는 시대는 지났다”=집회에 참석한 시민 상당수는 광우병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공유했다. 외국 사례도 꿰고 있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과거 산업화 시대엔 정보의 독점이 가능했다. 국가가 여러 정보를 가지고 선도했고 국민이 따라갔다”며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이젠 이게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젠 쌍방향의 통치를 모색할 때인데 개발주의 시대의 정치적 상상력으로 이끄는 듯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도 “이명박 대통령은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만 하고 있는데 국민이 못 알아준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지만 잘한다고 다 알아주는 게 아니다”며 “(지도자가) ‘나를 따르라’고 하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고 강조했다.  

고정애·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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