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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서 앞선 유방, 천하 움켜쥐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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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초한지』를 완간한 이문열씨는 "중국의 역사소설 집필은 이제 끝내고, 한국 역사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치적 격동 현상은 그와 떼어낼 수 없는 운명인 것일까. 그는 자신의 본령인 문학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그에게 자꾸만 정치적 발언을 요구하는 것 같다.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직전 국내에 들어와 진보에서 보수로의 권력이동을 지켜봤던 그다. 이번에도 대규모 촛불집회라는 또 다른 역사의 현장을 목도했다. 작가 이문열(60)씨 얘기다. 2년 6개월째 미국에 머물고 있는 그가 역사소설 『초한지』(楚漢志·전10권·민음사) 완간에 맞춰 잠시 귀국, 11일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는 『초한지』 얘기를 하는 틈틈이 촛불집회와 현실 정치를 곁들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촛불집회 관련 기자들의 ‘예정된 질문’에 그는 부담스러워했다. “위대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인 것 같다”는 일종의 ‘준비된 답변’을 내놨지만 그는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장 걱정했던 질문이다” “막상 물으니 피할 수가 없다”거나 “내가 얘기한대로만 써달라”는 등의 당부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그는 촛불집회에 대해 양비론적 입장을 선보였는데, 그에 대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이 기사화될까봐 우려하는 것이었다. 당초 그가 2005년 12월 아무런 준비없이, 그야말로 훌쩍 미국으로 떠난 이유가 정치적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해 대선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시대화의 불화에서 이제 놓여 나고 싶다”고 했던 그의 바램이 이날의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삼국지』와 『수호지』의 평역에 이어 『초한지』를 완간함으로써 그는 중국의 주요 역사소설을 두루 섭렵하게 됐다. 그는 이제 중국 역사소설 집필은 끝내고, 한국의 역사소설을 한 편 써보고 싶다고 했다. 『삼국지』『수호지』와 달리 『초한지』는 그의 창작물이다. 『초한지』는 기원전 3세기 중국의 진말한초(秦末漢初) 시대 천하의 패권을 놓고 겨룬 유방과 항우 두 영웅을 중심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이씨는 사마천의 『사기』를 원전으로 하고 『자치통감』『한서』 등 역사서를 보조자료로 삼아 기존에 알려진 『초한지』를 완전히 새로 썼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기존에 『초한지』라고 출간되는 책들은 대개 명나라때 종산거사가 쓴 『서한연의』를 원전으로 한 것인데, 가장 긴 것이라고 해야 분량이 5권 정도 밖에 안되는데다 종산거사는 많은 부분을 상상력과 개인 창의력에만 의지하다보니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집니다. 역사소설은 ‘7푼의 사실과 3푼의 허구’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인데 『서한연의』는 그 비율이 뒤집힌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정사에 의존하면서 훨씬 재미있게 구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쓰게 됐습니다.”

유방과 항우에 대해 그는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유방을 대단한 순발력과 임기응변을 갖춘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점에서도 유방은 항우와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유방과 항우 두 사람의 리더십 유형에 대해 설명하려는 노력은 『사기』에서부터 엿보입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기에 유방은 미화됐고 항우는 폄훼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유방의 강점인 엄청난 순발력과 임기응변 등에 대한 서술은 보이지 않고 주로 탐욕스러운 시정잡배처럼 그려져 있어요. 『초한지』를 쓰기 전에는 항우가 더 소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런 설명도 덧붙였다. “가령 항우에게 쫓겨 달아나던 유방이 적에게 붙잡힐까봐 수레에 타고 있던 자식들을 밖으로 던지는 모습에 대해 유방의 비정함과 파렴치한 욕망으로만 해석됐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자기를 살리기 위해 죽은 많은 장병들을 생각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지 혼자 살려고 자식을 버렸다고 보지 않는 겁니다.”

이씨는 7월 15일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오는 10월께 완전 귀국할 예정이다. 2년 반동안 한국의 집을 비워놓다 보니 급수, 배관 시설 등이 전부 고장나 있다고 했다. 그가 운영했던 부악문원도 계속할지, 해체할지에 대해서도 연내 결정할 계획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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