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돌아온 엄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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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이가!” 영필(김영필)과 성효(심성효)는 엄사장(엄효섭)의 부름을 받고 울릉도를 떠난다. 서운했던 마음도 잠시, 위기에 처한 ‘큰형님’을 위해 다시 서울행을 결심하며 엄사장이 부르짖는 것도 바로 이 말이다.


  비밀 사무소가 차려진 포항의 한 티켓 다방에 엄사장과 옛 친구들이 모인다. 요식업 중앙회장 선거에 나선 큰형님을 돕기 위해서다. 전과가 많고 여자도 주위에 붐빌 정도로 ‘갖출 것 다 갖춘’ 큰형님이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 엄사장은 여론을 뒤집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당선이 유력한 상대편 후보의 외아들을 납치한다는 것이다. 상대 후보를 상심시켜 기권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영필과 성효는 엄사장의 비밀요원 제안을 거부한다. 울릉도로 돌아가겠다는 두 사람을 향해 엄사장은 “야망과 포부가 없다”고 호통을 친다. “창문을 열 용기가 없다면 창을 깨트리라”며 폼을 잡는다.
  겨우 내부 단속이 될 만한 상황에서 난데없이 한 청년이 비밀 사무소에 들이닥친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연극열전2의 다섯 번째 작품인 ‘돌아온 엄사장’(박근형 작·연출)은 박근형이 2005년 연출한 ‘선착장에서’의 후속작이다. 명동 삼일로 창고소극장 무대에 올랐던 선착장에서는 그해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전편을 잇는 이러한 후속 시리즈는 영화와 달리 연극 무대에서는 흔치 않다.
  선착장에서가 울릉도라는 은폐된 공간을 배경으로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다면, 돌아온 엄사장은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울릉도에서 포항으로 올라온 엄사장과 주변인물들의 변함없는 이기심과 속물근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의리니 야망이니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만 이들 사이엔 어김없이 계좌번호가 오간다. 한껏 주눅 들게 한 아들(고수)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엄사장은 친자 여부를 들먹이며 뒷북을 친다. 웃통까지 벗어던진 영필도 까칠한 고수 앞에서 몸을 낮추기는 마찬가지다. 관내 문제를 전화로 해결하는 김경사(김도균)나 이순경(이준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겁 많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욕 잘하고, 그러나 어느 한구석 우리를 닮은 인물들을 통해 일그러진 세상사를 보여주려 한다”는 게 박 연출의 설명이다.
  극단 골목길의 간판 배우 엄효섭은 아들의 죽음을 애달파 하다가도 큰형님의 전화에 금세 목소리가 바뀌는 변덕 심한 인물 엄사장을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KBS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강직하고 따뜻했던 교사 ‘서경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쪽대본을 바탕으로 배우들이 직접 살을 붙여가는 ‘극단 골목길표’ 연극을 위해 뭉친 김영필·황영희·김도균·이준혁·유나미의 호흡도 매끄럽다. 극중 유일하게 진지한 역을 맡은 고수는 연극 데뷔 무대에서 무리 없이 녹아든다.
  선거전·납치·살인…. 중심 소재가 주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겁거나 암울하지 않다. 질펀한 사투리와 욕설로 맛깔나게 버무린 대사와 돌발적인 상황이 정감있고 유쾌하다.
  8월 3일까지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화~금 오후 8시, 주말·공휴일 오후 3시·6시.
문의 02-766-6007

프리미엄 김은정 기자
사진제공=동숭아트센터 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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