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대의민주주의의 종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민주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나쁜 통치제도다. 다른 더 나쁜 정치체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처칠이 의회에서 한 연설이다. 그의 회고대로 “적들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시점에 유권자들로부터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아” 열을 좀 받았을 터다. 그래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는 없다는 그의 신념이 녹아든 역설적 표현이었다.

처칠이 말한 게 대의민주주의였다. 다수의 유권자에게서 위임받은 소수가 국가권력을 행사한다. 그 유권자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쟁영웅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대신 노동당을 선택할 정도로 변덕스럽다. 유권자가 특정 시민계급에서 모든 성인 남녀로 확대되면서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돼버렸지만 20세기는 대체로 무난하게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왔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예부터 대의제의 위기가 지적돼 왔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아니다. 이 땅의 유권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믿지 않는다. 5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대통령을 만들고, 한 정당에 과반 의석을 몰아주고서도 그들이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뽑은 것도 아니다. 대선에서 37%, 총선에서는 무려 54%의 유권자들이 투표소에 가지 않았다. 보수건 진보건 동질성을 느끼지 못하니 찍을 사람이 없었던 거다. 설령 내가 찍었더라도 선량들을 임기 동안 멋대로 내버려둘 생각이 없다. 마음에 안 드는 대표의 응징을 다음 선거 때까지 미룰 의향도 없다. 미성년 학생들조차 투표권을 얻을 때까지 입을 다물 작정이 아니다.

모든 게 통신의 힘이다. 오늘날 유권자들은 불만을 안줏거리로 씹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의견을 인터넷에 올리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든다. 그들이 모니터 앞에서 의기투합해 밖으로 나온 것이 촛불시위대인 거다.

대표들도 유권자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 때부터 거듭된 경고음에 대통령은 귀를 막았다. 집권당은 그런 대통령의 눈치만 살폈고 청와대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야당은 아예 거리로 나섰다. 국민의 분노를 실지(失地) 회복의 기회로만 여겼다. 슬그머니 촛불대열에 끼어들었지만 따가운 눈총 말고 다른 건 얻지 못했다.

유권자(또는 미래의 유권자)들의 직접 행동에 놀란 정부는 10조원대 민생대책을 내놓고 촛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적쇄신 폭을 얼마나 넓혀야 거리의 민심을 달랠까 전전긍긍이다. 정부 요청에 미국 대통령까지 구원투수로 나서는 지경이 됐다. 그야말로 통신과 행동을 통해 개개인의 의사를 수렴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급가속된 데는 정치권에 대한 대통령의 부정적 시각도 한몫했다. 이른바 ‘탈(脫)여의도 정치’로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귀를 막으니 국민이 정부와 직접 맞섰다.

 개인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열린 사회의 도정에서 불가피한 현상일지 모른다. 존 나이스비트 같은 미래학자는 그런 사회에서 정치인이란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국민이 정부와 직접 소통하니 대리인이 필요할 리 없다. 하지만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소수의 목소리는 댓글 도배질로 덮어버리는 마녀재판과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선정적(심지어 조작된) 동영상, 현실무시 대안부재의 포퓰리즘을 우리가 체험하고 있듯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사안마다 촛불이 들릴 수는 없다. 그 비용은 결국 유권자가 떠안아야 한다. 돈보다 심각한 건 국론분열이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상처는 쉬 아물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정치와 유권자를 잇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실업 위기에 몰린 정치권이 먼저 나서 고민해야 한다. 처칠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면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