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방송법안폐기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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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치적 경위야 어찌 됐든 제정거부 여론이 강했던 방송법안을 14대 국회에서 일단 강행을 포기하고 폐기키로 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본다.일부에서는 지금 법을 통과시키지 못해 위성방송 운영을 설계하는 데 차질이 왔다고 염려하기도 하지만 방송법안을 졸속으로 처리했을 경우 위성방송을 조금 일찍 설계하는 것보다 열배,스무배 더 큰 것을 잃는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쟁점이 된 것은 위성방송채널 허가를 언론사(주로신문사)와 대기업에도 준다는 조항을 법안에 넣느냐 여부였다.정부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위성방송 준비를 빨리 시켜 국제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기존 방송사들은 지금처럼 비대해 있는 신문사들이 방송까지 쥐게 되면 그 힘이 주체하기 어렵게 되며,대기업 참여의 경우 자본의 힘 때문에 상업주의가 판쳐 문화발전이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한다.좁은 「안방」을 시장으로 삼아 50~60개 텔레비전 채널이 생사를 걸고 자본경쟁을 해 누구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제 시청자들,즉 국민들은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하루 서너시간 정도는 텔레비전 앞에서 보낼 판이다.텔레비전을 유지하기위해 지금까지는 한사람당 연간 4만~5만원의 경비가 들었다.그런데 이것이 얼마 안가 몇십만원의 부담으로 다가 오게 된 것이다. 경비는 물론 광고료.수신료등 직.간접방법이지만 그만한 부담은 필연적이다.또자본을 대거 투입한 방송기업들이 이익을 위해벌일 경쟁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여론도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다.이런 중요한 일,즉 국민 각자에게 고르게 영향을 미치는 일을 전처럼 정부부처 혼자 결정하지 말라는 게 비등한 의견이다.다시 말해 방송허가권을 전처럼 정권 차원에서 사용하지 말고 선진외국과 같이 국민의 대표가 참여해 「같이 책임지는」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선거때마다 남발된 방송허가 약속도 문제려니와 역시 선거를 앞두고 어떤 형태의 기업엔 허가를 줄 수 있다는 법조문도 문제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문화.사회환경에 따라 전문 대표기구가 사안별로 정할 일을 법조문 만으로 결정하면 특혜에 대한 시비가 또다시 되풀이될 것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정부는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언론의 자유가 꽃피었다고 강변했지만 사실 언론이 특혜와 통제의 양극단에서제대로 벗어나 본 일은 거의 없었다.특히 방송의 경우는 이론적으로 허가와 통제가 인정되는 부문인 만큼 더욱 권력의 그늘에서벗어날 수 없었다.
모처럼 문민정부의 개혁영향이 방송에도 미친다고 기대했지만 「방송권력」을 운용하는 방법에선 한치도 달라진 게 없이 새 방송법안이 국회에 제출되는 통에 크게 실망하고 반대하는 목청이 높았던 것이다.그것이 쟁점이었다.
새 방송법안은 일단 폐기됐다.미련없이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위성방송 운영에 차질이 생겼다고 하지만 사용하기로 결정한 새 기술인 디지털방식으로 본격 방송이 되자면 앞으로 3~4년은있어야 한다.텔레비전 채널 12개가 당장 가동하 지 않는다고 국민생활이 크게 불편해질 까닭도 없거니와 그 때문에 영상산업의세계화가 더디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보다 훗날 우리방송이 떳떳지 못한 과거가 있었다고 반성을 거듭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정부권력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도록 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본다.
폐기된 법안에 담아야 할 사안은 15대 국회 개원을 목표로 다시 공공 대표기구에 맡겨 설계하도록 하되,방송허가 방향은 세계화란 시대현실을 참작하고 여론도 고려한 기준을 따라야 할 것이다.어차피 방송이란 여론 그 자체를 위한 매체이 기 때문이다. (건국대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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