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수송차량 탈취 범인 3주새 2억대 ‘흥청망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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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일 밤 서울 광진구 쉐라톤 워커힐 호텔 14층. 사복을 입은 경찰관 10명이 객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한 쌍의 남녀를 붙잡았다. 수억원이 실린 현금수송차량을 타고 달아났던 허모(38)씨와 그의 애인 신모(29·여)씨였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남녀는 호텔방이 아니라 경찰서로 향해야만 했다. 20일간 허씨의 호화로운 도피 생활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현금 수송차를 운전해 달아난 혐의(절도)로 허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8일 밝혔다. 허씨와 함께 있던 신씨에 대해서는 범인도피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현금지급기 용역회사의 직원인 허씨는 지난달 17일 오전 10시 50분쯤 강남구 청담동 모 편의점 앞에서 현금 수송차를 몰고 달아났다. 다른 직원들이 편의점 현금인출기에 돈을 채우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린 것이다. 허씨가 용역업체에 취업한 지 열흘 만이었다.

허씨가 몰고 달아난 차에 실려 있던 현금은 2억6700만원. 그러나 검거 당시 남아 있던 돈은 2400만원뿐이었다. 20일 동안 2억4300만원을 써버린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 허씨는 “사업 하다가 1억원가량의 빚을 졌으며 이를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실제 그 돈을 빚을 갚는 데 썼는지 조사 중이다.

나머지 현금은 허씨의 호화 도피생활에 사용됐다. 허씨는 범행 직후 양재동의 한 중고차매매상에게 7700만원을 주고 BMW를 샀다. 차량 등록비에만 600만원이 들었다. 허씨는 BMW를 산 이유에 대해 “평소에 너무 타보고 싶었던 차”라고 밝혔다.

잠자리는 하루 숙박료가 수십만원인 고급 호텔에 마련했다. 부산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 40만원을 내고 원룸에서 지낸 10여 일을 제외하고는 허씨는 주로 고급 호텔에서 머물렀다. 경찰은 허씨가 나머지 수천만원가량을 호텔 숙박비 등 도피자금과 유흥비에 탕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허씨의 ‘호화 도피 생활’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BMW나 고급호텔이 경찰의 검문검색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노렸다는 것이다. 사기·횡령 등 전과 16범인 허씨가 경찰의 수사 관행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허씨는 경찰의 추격을 비웃듯 대담한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달 19일 부산으로 도주하던 허씨는 택시 운전기사 윤모(38)씨를 100만원에 매수해 트렁크에 숨어 경찰의 검문검색을 피했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공개수배됐지만 허씨는 인터넷에서 구입한 ‘대포폰’으로 지인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도움을 청했다. 이달 1일부터는 서울로 올라와 애인과 함께 지냈다.

그러나 허씨의 행적은 대포폰 사용으로 발각되고 말았다. 경찰은 허씨의 친구 이모(38)씨가 자주 연락을 취하던 전화번호를 추적해 허씨의 대포폰인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휴대전화 위치추적 끝에 허씨가 5일부터 서울 워커힐 호텔에 머물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박유미·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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