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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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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2년 4월 19일, 미국 NBC의 워싱턴 지국은 ‘DPT: 백신 룰렛’이라는 한 시간짜리 뉴스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백일해 백신 성분이 신경에 끔찍한 손상을 일으켜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심한 장애를 앓는 어린이의 영상과 가슴 저미는 부모들의 증언을 생생하게 내보냈다. 이 내용은 그후 몇 주에 걸쳐 NBC의 ‘투데이 쇼’와 여러 신문에서 다시 보도됐다. 그러자 전국의 모든 소아과 의사들에게 전화가 쇄도했다. 예방접종을 받은 자녀들이 곧 죽게 되느냐고 부모들이 문의했기 때문이다.

식품의약국(FDA)은 즉시 45쪽에 달하는 반박자료를 배포했다. 백신이 사망이나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이 같은 해명을 축소 보도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백신 피해자 단체가 결성돼 조직적으로 모금과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84년에 이르자 항의 집회, 피해자 단체의 청문회 증언, 대형 소송에 시달리다 못해 DPT 백신 제조업체 세 곳 가운데 두 곳이 문을 닫았다. 몇 년 후 100만 명에 가까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조사연구 결과 백신의 위험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불안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이 사태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사태를 촉발한 결정적인 보도가 있었다. MBC PD수첩이 4월 29일 방영한 ‘긴급 취재!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였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대다수 언론이 이를 축소 보도하고 위험을 과장해서 파헤쳤다. 시민들은 ‘위험한’미국 쇠고기를 자신도 모르는 새 먹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연일 시위를 벌였다.

피해는? 미국에선 백신 접종을 꺼린 탓에 백일해에 걸리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한국에선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해야 할 처지가 됐다. 국가 신인도가 떨어지고 미 의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을 감수하고.

백신이든 광우병이든 실질적인 위험이 그토록 작은데도 대중이 쉽게, 커다란 공포심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포의 문화(The Culture of Fear)』를 쓴 미국 사회학자 배리 글래스너는 ‘공포의 상인’들을 지목한다. 판매부수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공포를 선전하는 언론매체, 공포 분위기를 조장해 표를 얻고 정작 중요한 사회 이슈로부터 국민의 이목을 돌려놓는 정치인, 사회의 공포를 자신의 마케팅에 동원하는 각종 단체들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영국 시인 새뮤얼 콜리지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공포에서 출발한 정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조현욱 논설위원

한·영 대역 [Fountain] Unfounded f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