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원칙과 명분 분명히 세울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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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오랜만에 겨울다운 겨울을 맞으리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다.
10년만이라던가.옷깃을 여미고 발을 굴러도 겨울은 겨울다운게 좋다.그래서인지 제법 맵싸하게 와닿는 요즘의 추위가 오히려 반갑다. 이른바 비자금 정국(政局)이 겨울로 접어드는 문턱에서도사그라질줄 모르고 있다.오히려 5.18특별법 제정 문제까지 겹쳐 상황은 확대일로다.5.18특별법 제정이 진실로 「제2의 건국을 하는 심정」으로 내린 결단인지, 「비자금정국 돌 파용」전략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얕은 소견으로 고소심처(高所深處)의 깊은 속내를 가늠키야 애당초 될성부른 일이 아니니 애써 판단내리려 할 생각도 없다.
역사에 맡기자던 예전 말과의 상치(相馳)를 들어 결심의 배경에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겠으나 이 또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5.18특별법 제정이란 정치적 결정의 합당성 여부며,또 그 결정이 합당한 것이라면 이를 어떻게 제대로 살리느냐 하는 것이다.
합당성 여부는 역사에 대한 물음에서 찾아야 한다.지난번 검찰은 5.18관련자들에 대해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논리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면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回軍)과 그 결과로서의 조선(朝鮮)건국 을 예로 들었다.이 또한 역사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물음은 이처럼 표피적인 것이 아니다.소수지배계층의 쟁투(爭鬪)로 왕권의 향방이 결정되고 하늘의 뜻에 정통성을 의탁하던 봉건사회에서의 새 왕조(王朝)수립과,주권재민(主權在民)의 기반위에서 투표로 통치권자를 선출 하는 민주사회에서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가로채는 쿠데타는 근본적으로 비교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회군과 군사변란,5공-또는 그 연장선상에서의 6공까지-의 성립과 조선의 건국은 표면적으로 유사성을 가질 수 있으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보다 가까운데 던져져야 한다.해방후 반민족적 친일행위자들을 처단키 위한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쓰라린 좌절을 되새겨야 한다는 얘기다.식민지배아래라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는 식의 상황론,해방후 건국을 위한 인재확보 라는 현실론으로 정권욕이 위장되면서 반민특위를 좌초시킨 이후 우리사회에는편리하게 꿰어맞춘 상황과 현실이 원칙과 명분을 압도하는 가치관전도의 상황이 자리잡았다고 나는 본다.
상황과 현실이 줄기와 가지라면 원칙과 명분은 그 뿌리다.그 뿌리를 든든히 세운 후에 가지와 줄기도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과 명분을 얘기하면 「원칙이야 그렇지만」또는 「명분이야 좋지만」하는 단서가 따라붙는다.원칙과 명분 이 옳으면 그 올바른 뜻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상황과 현실을 짚어봐야 하는데도 상황은 반대였다.
5.18관련자에 대해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린 검찰은 이제같은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거나 특별검사제 도입이란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원칙과 명분보다상황과 현실을 좇은 결과다.
민주.법치국가에서 자행된 군사반란과 양민학살이라는 명백한 범죄행위에 대해법에 정한 처벌을 해야 함은 마땅하다.그럼에도 정치적 상황,정치적 현실론의 득세로 이러한 원칙과 명분이 지켜지지 못함으로써 이제 와서 공소시효를 둘러싼 법리논 쟁을 벌이고소급입법의 불씨를 만드는 상황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또 한번 원칙과 명분을 분명히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됐다.겨울이 겨울다워야 하듯 죄 지은자는 처벌받는다는 당연한 원칙을 이번 기회에 굳건히 세워야 할역사적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국제경제 팀장) 박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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