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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법령에 맞추지 않고 법령을 사람에게 맞추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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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以法爲人(이법위인)’. 법으로 사람을 위한다는 뜻이다.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15층에 있는 이석연(사진) 법제처장의 집무실에는 이 같은 문구가 걸려 있다.

헌법 전문가인 이 처장은 취임 후 국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법령의 개폐 작업에 나섰다. “사람을 법령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법령을 사람에 맞추겠다”는 것이다. 그는 2일 “정부 수립 60년간 법을 만들어 오기만 했지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한지를 검토하는 작업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법령 개폐 작업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다음은 이 처장과의 일문일답.

-국민 불편 법령을 개폐한다고 하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뭔가.

“종전에는 국민 불편 법령을 발굴하고 추진하는 과정을 해당 부처에 맡겼다. 하지만 해당 부처에 맡겨 놓으면 한계가 있어 국민과 함께 찾아내자는 것이다. 물론 부처 의견도 들어가면서 할 것이다.”

-법령 개정과 함께 폐지도 집중 검토하고 있는데 이유는.

“과거의 법령 정비는 어떤 제도가 있으면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만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규제가 꼭 필요한가를 검토할 시점이 됐다. 제로베이스에서 규제가 필요한지를 검토하고 있다.”

-가장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법령은.

“불필요하게 국민을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령들이다. 가령 예를 들면 운전면허증을 휴대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이 있다. 현실적으로 면허증을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다. 정기 적성검사를 6년마다 하는데 이것도 형식적이다. 식당 영업허가 전 형식적인 위생교육의 폐지, 공장 설립과 건축허가 절차의 통합도 필요하다.”

-기업 및 영업활동을 규제하는 법령 정비는.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중소기업 창업 지원 관련 법이 많이 있다. 무슨 지원법, 진흥법, 촉진법, 조성법 등을 가만히 보면 이를 근거로 정부 개입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중소기업기본법 하나로 다 통합하고 창업 절차도 집어넣으면 간소화할 수 있다.

-법령이 모호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 법을 만들 때 법령 내용은 모호하게 하고 자세한 것은 각 부처장 고시 등 하위 법령에 위임한다. 결국 공무원들에게 재량의 여지를 많이 준다. 인·허가가 어려우면 권한 남용에 부패로 이어진다.”

-해당 부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

“내가 예전에 공직 생활을 행정·사법 합쳐서 15년 했는데 이 정도로 공직사회의 권한제일주의가 심각한지 몰랐다. 국민과 단절돼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각 부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데 국민 입장에서 보면 권한을 놓지 않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장·차관 사이에서 왕따를 당해도 소신을 가지고 밀어붙이겠다.”

-앞으로 국민 불편 법령 개폐 작업을 어떻게 추진할 건가.

“국민 불편 법령을 발굴하고 추진하는 것은 시민단체와 함께하려고 한다. 진보건 보수건 관계 없다. 국민 생활에 불편을 주는 것은 이구동성으로 말해야 한다. 나는 경실련, 뉴라이트 다 근무해 봤다. 각 부처가 권한 유지를 이유로 장기 과제로 미룰 경우 공론화하려고 한다. 국민이 판단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세무조사 기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중소기업들은 세무조사 기간을 명확히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게 법에 없다. 국세 조사 업무처리 규정 예규로 돼 있다. 국세청이 안 지켜도 되는 것이다. 세무조사를 계속 연장하면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우리도 뭘 갖고 가야 할 거 아니냐’고 한다. 안 나오면 털고 나가라는 거다. 중소기업들이 세무조사 안 받겠다는 것도 아니다. 기간을 명확히 해 달라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지율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까지 온 데 대해 각료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어떻게 소통을 잘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신뢰 회복이 먼저 돼야 한다. 정부가 원래의 목표를 국민의 협력 속에 끌고 나가려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일을 벌이기도 전에 이런 문제가 터져 막느라고 볼 일 다 본다. 안타깝다.”

-간통죄나 사형제에 대한 생각은.

“간통죄 헌법소원은 이번이 네 번째다. 행복추구권,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위헌이라고 보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제 폐지해야 한다. 규범력을 상실했다. 사적인 영역까지 국가가 법을 발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형제도는 인격권·생명권을 침해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국민의 법 감정이나 현실에서 볼 때 바로 폐지하기에는 시기상조다.”

글=박성우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이석연 법제처장=1954년 전북 정읍 출생. 전북대 법학과,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 행정고시 23회와 사법시험 27회에 합격했다. 법제처 사무관, 법제관(1980~89),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89~94)을 거쳤다. 경실련 사무총장,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장,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헌법포럼 상임대표, 시민과 함께 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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