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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의 즐거운 천자문] 오락프로 탈장르화 시청자들은 즐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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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건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그맨 이휘재가 결혼을 전격 발표했다. 자신이 출연하는 오락프로 ‘일요일 일요일밤에’를 통해서였다. 시청자에게 ‘놀라지 마시라’고 운을 뗀 후 그가 소개한 배우자는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탤런트 김애경씨였다. 연상연하 커플이 지금처럼 흔치 않던 시절이다. 둘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하고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이 너무도 드라마틱하기에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믿어버렸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터졌다. 당사자들은 몰려드는 취재진에 놀라버렸다. 웃기려고 꾸며낸 해프닝이라는 해명은 먹히지 않았다. 놀란 부분은 죄가 되지 않지만 놀린 부분은 죗값을 치러야 했다. 이야기를 꾸민 제작진은 중징계(시청자 사과방송 명령)를 받았고, 시킨 대로 ‘놀아난’ 두 연예인은 한동안 방송 출연을 자제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시청자를 ‘놀린’ 이휘재는 지금 문제의 그 프로에서 다시 즐겁게 ‘놀고’ 있다. 시간이 바뀌었고 시각이 바뀐 덕이다. ‘저게 드라마야, 예능프로야?’ 굳이 나눌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른바 꿩 잡는 게 매다. 재미만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 시청자는 관대하다.

TV에서 장르를 나누는 게 점차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나 ‘일밤’의 ‘우리 결혼했어요’는 기획의도가 다르지 않다. 접근방식이 다를 뿐이다. 신중하게 결혼하고 이왕 결혼했으면 자신만을 주장하지 말라는 게 요지다. 클래식이면 어떻고 팝이면 어떤가. 귀가 즐겁고 마음이 편안하면 그게 좋은 음악 아니겠는가.

잘 짜인 대본에 따라 배우가 치열하게 연기하면 시청자는 대체로 만족한다. 이순재씨는 ‘사랑이 뭐길래’에서 김혜자씨의 남편이었다가 ‘목욕탕집 남자들’에선 강부자씨의 남편이었다. 같은 작가(김수현)가 쓰는 ‘엄마가 뿔났다’에서 당시의 부인들은 며느리고 딸이다. 그게 드라마다.

순한 것의 반대는 독한 것이고 약한 것의 반대는 강한 것이다. 독한 게 살아남을 것 같지만 TV엔 강한 게 살아남는다. 지금 오락의 강자인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장르는 어찌 보면 드라마의 ‘짝퉁’ 같다. 절대로 저들이 결혼했을 리 없고 결혼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이는데 그들은 한 집에서 알콩달콩, 티격태격 살림 차리고 산다. 한마디로 ‘놀고’ 있다. 그들은 시청자를 놀리는 중일까.

나이가 들면 주름이 는다. 걱정은 마음의 주름이다. TV가 저래도 될까? 걱정할 거 없다. 재미의 다음 정거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싫증이다. 재미가 그 역을 무사히 통과하고 감동이라는 종착역에 이르려면 마지노선을 지키는 게 필수다. 그것이 무너지면 인간의 존엄이 손상된다. 제작자와 출연자가 시청자를 사이에 두고 쌓아둔 마지막 보루. ‘마지막까지 노(no)라고 소리 질러야 할 지점’ 그곳이 마지노선이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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