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장인어른, 남대문 시장 풍경에 홀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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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호주인 장인과 한국인 사위가 서울 북촌 한옥에서 합동 전시회를 열었다. 주인공인 화가 로버트 리디코트<右>와 조각가인 최진호씨. 리디코트는 외손자를 안고 있다.

서울 북촌 한옥마을의 소나무 갤러리. 가회동 전통한옥에 자리잡은 전시장에 들어서자 어디서 본 듯한 남성이 인사를 건넸다. 조각가 최진호(40). 그는 호주 원로 화가인 로버트 리디코트(74)와 ‘김치, 베지마잇(vegemite·호주버터)을 만나다’라는 이름의 전시를 이곳에서 다음달 18일까지 열고 있다. 리디코트는 최씨의 장인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호주 화가와 한국인 조각가, 푸른 눈의 장인과 검은 눈동자 사위가 함께 뭉친 자리다. 2006년 시작해 올해가 세 번째 공동 전시회지만, 한국 냄새가 물씬 나는 한옥 갤러리에서 열기는 처음이다.

“양국의 대표적인 음식을 연결해 국경을 넘어선 예술적 소통을 이야기하고 싶었죠. 그런 컨셉트의 전시회를 한옥에서 열면 더욱 강한 인상을 줄 것 같았고요. “

중앙대 조소과 출신인 최씨는 종이와 돌을 이용해 해태 상을 만드는 조각가다. 관훈·경인 미술관 등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리디코트는 점묘법을 이용한 유화 풍경화로 호주에선 알아주는 화가다. 딸 메리제인 리디코트(44)가 6년 전 주한 호주대사관 교육과학참사관으로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리디코트를 사로잡은 것은 한국의 재래시장이다. 남대문 시장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서 채소를 파는 아줌마, 모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꽃가게, 무심한 듯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생선 장수 아주머니 등 그는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만 80여 점을 그렸다.

“알록달록한 파라솔이나 시장 아주머니들의 원색 옷차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그림 소재라면서요. 그때부터 장인 어른은 한국에 푹 빠졌어요.”

리디코트는 강원도 용평과 오대산·경주·청평 등에서 사람과 풍광을 담아낸 작품들과 최근 작업을 마친 정선의 가리왕산 풍경화 등 한국적 냄새가 풀풀 나는 신작들을 새로 선보였다. 최씨는 화강석 해태 상을 새로 조각해 총 7점을 내놨다.

“장인 어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사진을 찍고 자세히 관찰하는 방법 등 작업할 때의 자세를 확실히 익혔죠.”

아내와는 2002년 석모도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국경을 넘어 사랑을 나눈 이들은 현재 네 살, 다섯 살 두 남매를 두고 있다. 장인은 딸이 검은 눈의 사내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두말 않고 ‘OK’했다.

로버트 리디코트의 한국 채소 장수들.

“제가 영어를 잘 못해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장인 어른께서 먼저 따뜻하게 맞아주셨죠. 같이 예술가이다 보니 말하지 않고도 뜻이 잘 통하더군요.”

최씨는 틈틈이 양복과 골프복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낯이 익었다. 모델로 20여 년을 활동했다. 심은하·고현정도 신인 시절 그와 함께 광고에 등장했다. 최근엔 배종옥과 운동복 카탈로그를 찍었다.

“아침엔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화장을 한 뒤 촬영을 하고, 오후엔 땀이 묻어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조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정말 ‘극과 극’이더군요. 한번은 작업복 차림으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더니 아주머니가 공사장 인부로 아시고 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시더라고요”

최씨는 동료 조각가 100여 명과 함께 숭례문 복원 기금 마련을 위한 공동 전시도 따로 준비하고 있다. 그는 “‘김치, 베제마잇을 만나다’ 전시를 호주에서도 열 계획”이라고 전했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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