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야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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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거대한 제국을 이끌었던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나라는 참 보잘것없는 국가였을 게다. 지금의 중국 구이저우(貴州)성 산골에 존재했던 야랑(夜郞)이라는 나라 얘기다. 전국 시대로부터 한(漢) 대까지 약 300년 동안 지탱했던 소국이다.

영토 확장을 일삼던 한 왕실의 무제(武帝)가 이곳에 사신을 파견한다. 인도 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신이 이곳을 들렀을 때 야랑의 왕이 “한나라와 우리 중에 어디가 더 큰가?”라고 묻더라는 것.

무제라는 인물이 등장한 한나라는 당시 대단했다. 서역을 개척하고 북방의 유목 민족을 진압한 뒤 세계적인 제국으로 크고 있던 한나라와 스스로를 견줬던 야랑의 무모함. 그를 비웃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결국 ‘야랑이 제 스스로 크다고 한다(夜郞自大)’라는 성어로 정착한다. 청(淸) 대에 들어 일부 유명 문학작품에 등장하면서 맹목적으로 제 스스로를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그런 상황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는다.

“작은 나라가 어딜 감히?”라는 중국인의 대국 의식이 우선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작은 나라에 몸을 기대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다.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해 시의적절한 대외 정책을 세우지 못할 경우 불러들일 재앙은 어떤 것일까라는 점이다.

중국은 대체로 자신의 주변에 대해 좋은 이름을 주는 데 인색했다. 몽골에 대해서는 뭔가 뒤집어 써서 앞뒤를 못 가린다는 뜻의 ‘몽(蒙)’이라는 글자를 쓴다거나, 날래고 잽싸 싸움에 능했던 훈족에 대해서는 언뜻 보기에도 어감이 좋지 않은 ‘흉노(匈奴)’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야랑도 그 나라가 썼던 명칭을 한자(漢字)로 음역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밤의 사내’쯤으로 해석되는 말을 붙인 데서 중국인의 그 독특한 대국 의식이 엿보인다. 밤의 사내-. 어둠에 싸여 제대로 판단을 못하는 사람을 일컬었던 것 아닐까.

세계 4대 강국의 힘이 교차하는 한반도는 대국이 아니다. 야랑의 수준은 넘어섰다고 할 수는 있지만 여전한 소국이다. 있는 것이라고는 강한 기질의 사람일 뿐, 물산과 자원이 거의 없는 나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한반도의 생존 고민이 낳은 전략적 선택이다.

요즘 쇠고기 문제로 터진 마찰이 결국 이러한 생존 전략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차분한 문제 제기는 필요한 일이지만, 정략적 의도에서 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밤거리와 국회에서 이뤄지는 정략적 행위들, 한 왕실에 의해 결국 멸망한 야랑의 전철로 한국을 몰고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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