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韓.日 '65년 체제'의 재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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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년전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토(細川護熙)전총리가 경주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하는 장면을 나는 도쿄에서 TV중계로 보고 있었다.호소카와 총리는 일제(日帝)의 한국지배를「침략전쟁」「식민지」로 규정하면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표정으로 한국에 「진사(陳謝)」했고,金대통령은 이제 「과거」문제는 완전히 해결됐고 미래를 향해 협력하자고 선언하였다.한.일 새 시대가 온 듯했다.
일본측 기자가 손을 들고 金대통령에게 이제 과거사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일은 없다고 보아도 되겠느냐고 질문하자 金대통령은 그렇다고 단언했다.한국측 기자가 손을 들고 호소카와 총리에게 질문하려 했다.나는 숨을 죽이고 응시했다.응당 침 략전쟁으로 규정하고 깊이 진사했으니 구한말의 합방조약은 소급해 원천무효로보아도 되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의 협력문제를 물었다.나는 보던 책을 TV를 향해 집 어던졌다.
그 직후 일본쪽에서는 대한(對韓)진사의 법적.제도적 후속조치문제가 거론됐으나 한국쪽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냉전이 끝나면서 일본에서는 자민당 장기 일당(一黨)집권시대가 와해되며 호소카와 정권이 등장하고 한국에선 오랜 군사독재정 권시대가 와해되고 문민정부가 등장해 새로운 한.일체제가 형성돼야 할 역사적 계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지금의 한.일 65년 체제는 미.소 중심의 냉전(冷戰)체제하에서 한국의 군사독재정권과 일본의 보수세력이 미국의 베트남전쟁수행전략에 밀려 급조된 것이다.이 체제하에서 일본의 보수여당은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차원에 서지 않았다.
따라서 의식면에서는 과거와의 연속적 연장선상에서 한.일관계를생각하는 집단이다.
한국의 군사정부도 과거청산보다 일본돈을 끌어다 경제재건하는데만 급급했다.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밀어붙인 것이 베트남전쟁 수행을 위한 동아시아 협조체제구축 전략이었다.그 결과로 나타난것이 지금의 한.일 기본조약체제다.
따라서 냉전과 한국의 군사독재시대가 끝나고 일본의 자민당 지배체제가 붕괴되고나면 65년 체제의 조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지금은 그러한 재조정의 진통기라 할 수 있다.사실 일본의 각종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70% 전후 사람들이 일본 은 아시아 제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최근 전후보상에 관한 정당별여론조사를 보아도 사회당은 92%,신진당은 65%,사키가케는 83.3%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했고 자민당은 48%가 해결되지않았다고 했다.다만 자민당 수뇌부 와 태평양전쟁 유족들을 비롯한 외곽단체가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망언(妄言)을 했다가 취소하고 사퇴하는 드라마가 계속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나 냉전후 일본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태는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단기적인 외교의 승부차원에서가 아니라 신(新)한.일체제 구축에 대한 장대한 비전을 갖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북한과 일본의 수교 협상과정에서일본은 늘 북한에 대해 한일기본조약과 균형을 맞춘다는 입장에서구한말 합방조약의 합법적 유효성을 강조해왔어도 정부는 모르는척했다.그런 경우 일본을 비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남북한의 대일공조체제를 형성할 수도 있지 않겠는 가.
또 최근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 일본이 원조삭감위협을 했을때 중국은 일본에 과거사문제를 들고 나왔다.중국과의 대일 과거사문제 공조체제형성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패권주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측면도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의 「한.일역사전쟁」결과 이제 북-일(北-日)조약이 과거의 합방조약을 긍정하는 차원에선 맺어질 수 없게 되었다.정부는한.일 65년 체제를 벗어나 신 한.일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장대한 비전과 다각적인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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