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승진.토익 시험등 준비로 책과 씨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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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연공서열제가 무너지고 능력위주의 경쟁사회가 된 요즘 직장인들은 고3생 못지 않게 고달프다.인사적체가 심한 은행이나 공사등국영기업체들은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만 승진할 수 있으며,승진시험이 없는 일반기업체들도 「세계화」바람을 타 고 강화된 외국어 능력 때문에 토익등 영어성적이 좋지 않으면 출세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직장인들을 새삼스럽게 책상머리로 불러 앉히는 최근의 사회 분위기는 이들의 가정 풍속도 또한 자연스럽게 바꿔놓고 있다.
남편이 수협에 다니는 주부 이영혜(29.강동구명일동)씨는 요즘 남편 얼굴을 사나흘에 한번꼴로 구경한다.내년 대리 진급시험을 앞두고 직장동료 4명과 함께 합숙 수험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 회사 바로 앞의 22평짜리 아파트를 5,300만원에 다섯달동안 전세내 이른바 그룹스터디를 하고 있는 남편은 주말에도 한두시간 아이들과 놀아주고는 곧바로 집앞 독서실로 가 영어.상식책과 씨름하며 지낸다.
『인사적체는 심하고 승진은 해야겠고 대입시험 못지 않게 치열하더라구요.제 입장에서는 이제 집도 마련했고 가정생활의 달콤함을 맛보려는 시기인데 남편이 저러고 있으니 좋을 건 하나도 없지요.』 평촌에 사는 주부 박영선(33)씨네도 사정이 비슷하다.한국가스공사에 다니는 남편이 내년의 과장진급 시험에 대비,직장과 독서실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고 있는 것.지난 7월 대리로 승진했던 남편은 대리 승진 2년차면 과장 승진시험을 칠 수 있다며 「이왕 시험을 치를 것이라면 남보다 빨리 되는게 좋다」는 각오로 안간힘을 쓰고 있다.승진 시험이 없는 일반기업체들도 승진단계마다 토익 점수 가산제를 도입,어학원 합숙훈련이나단기 어학연수 등을 위해 가장이 3~6개월 씩 집을 떠나 있는경우가 드물지 않다.정보화 시대를 맞아 기업마다 중간관리층의 축소가 불가피해지고 이에 따라 승진의 문턱은 점점 좁아지고 있기 때문에 30대 가장을 중심으로 「가정의 단란함을 일정기간 포기하더라도 일단 낙오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미원의 한 직원은 『대리.과장.부장등 모든 승진 단계에서 토익점수및 경영.마케팅.시사상식 등을 30%가량 감안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집에 가서도 식구들과 마음 편히 어울리기 힘든게 사실』이라고 털어놓는다.거기에다 신세대 주부일수록 「남편 출세=가정의 행복」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해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도 많다.
정신신경과 전문의 이택중(李澤重)씨는 『「승진」의 스트레스 지수는 아주 높은 편』이라며 제때 승진하지 못해 괴로워하거나 승진시험때문에 진정이 안된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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