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라빈사후 중동평화의 장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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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동(中東)의 역사는 예측불허의 서사시적 양상을 보여왔다.평화와 분쟁,갈등과 화해의 드라마가 중동의 역사적 궤적을 형성해왔던 것이다.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 이은 사다트 이집트대통령의 피살이 그러했고,이번 라빈 이스라엘총리 피살 역시 중동평화가 내포하고 있는 비극적 서사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라빈 총리의 갑작스런 죽음은 중동평화의 앞날에 대한 비관론을대두시키고 있다.극우 강경파의 파괴적 광란주의가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심리적 패배주의를 고착시키면서 평화정착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주의는 하나의 기우(杞憂)일 수도 있다.오히려 라빈의 죽음은 위기의 벼랑에 서있는 중동평화체제에 새로운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그 반전(反轉)의 논리를 다음 세가지 이유에서 찾아본다.
첫째,라빈의 피살은 이스라엘 국내여론을 역전시켜 평화협정에 대한 지지기반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지난 93년 평화협정 체결후 라빈은 심각한 내부적 저항에 봉착해 왔다.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그치지 않는 팔레스타인 테러활동 ,요르단강 서안 정착민들의 집요한 철수거부,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와 관련된 여러가지 장애들은 이스라엘 내부의 극우 반(反)평화세력들의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반면,라빈과 집권 노동당 연정의 지도력에 커다란 제약을 가해왔다.
그러나 라빈의 비보는 이스라엘 국내정치구도를 역전시킬 것으로보인다.국민여론은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리쿠드당을 포함한 극우 과격세력에 등을 돌리고 있으며,온건노선을 표방하는 노동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특히 평화협정에 관 한 한 라빈과공조체제를 유지해오던 시몬 페레스의 총리직계승이 확실시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존의 평화노선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 둘째,라빈의 죽음은 아라파트에게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있다.평화협정 체결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아라파트의 지도력은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아왔다.평화협정 자체를 부인하면서 「지하드(聖戰)」를 선언해온 이슬람원리주의 노선의 하마스는 아라파트의 권위와 정통성에 직접적 위협을 가해왔다.PLO 자체의 내분도 심화돼왔다.그러나 라빈 피살에 따른 친(親)평화체제적 국제여론및 아랍여론의 형성은 하마스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아라파트의 지도력 부활과 평화노선 추진에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이란 변수를 들 수 있다.93년 평화협정은 미국의 산파역으로 이루어졌다.사실 미국의 지속적 지원과 보장없이중동평화협정은 현실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라빈의 피살은 중동평화에 대한 미국내 여론을 극적으로 되살려주고 있다.대통령선거기간중은 물론 그후에도 중동평화는 미국의 주요 외교정책 사안으로 부상될 것이며,이는 중동평화 정착의 청신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라빈의 죽음에 대한 아랍의 일반 여론은 아직은 냉소적이다.이스라엘 내부의 정치,이념적 파편화 현상 역시 그 골이 깊다.그리고 골란 고원을 쟁점으로 한 시리아와의 평화협정이 아직 미제(未濟)로 남아 있고,팔레스타인 자치와 관련 된 기술적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사실 2,000년 이상 누적돼온 고질적 갈등이 단숨에 해소될수는 없다.그러나 이번 라빈의 사망을 계기로 극우 유대 민족주의자들이나 파괴적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반면 라빈의 장례식이 웅변적으로 상징 하고 있듯 이스라엘과 아랍 온건파들간 수평적 연대의 명시적 형성은 평화협정의 정착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이렇게 볼 때 라빈을 「평화를 위한 순교자」라고 지칭한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찬사는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라빈 의 죽음은 중동평화 구축에 있어 역사반전의 논리를 단적으로 예시해주고 있다.
(연세대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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