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간 정신병원서 보낸 日 징용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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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말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소년 지원병들의 출정 모습. [중앙포토]

남은 것은 유골과 현금 4만엔, 그리고 '조선'국적의 외국인등록증뿐. 잊고 갈, 간직하고 갈 기억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김백식(金百植)-.

일제 말인 1944년 일본군으로 끌려간 뒤 정신병을 일으켜 45년간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숨진 일본명 긴바라 햐쿠쇼쿠(金原百植) 이등병의 의료기록엔 '전쟁터 불명'이란 글만 남아 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28일 평생을 일본 병원 정신병동에 누워 있다 4년 전 홀로 숨진 한국인 징병자 김백식씨의 기구한 사연을 소개했다. 전장(戰場)의 공포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병을 일으켜 후송된 군인은 약 1만명. 金씨도 그 중 한명이었다.

45년 5월 나가노(長野)현 육군병원을 거쳐 국립 정신.신경센터 무사시(武藏)병원으로 이송된 金씨의 증세는 처음 몇년 계속 나빠졌다.

증세가 안정된 뒤엔 말을 잊었다. 6인 병실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멍하니 보는 게 일과였다. 그를 오래 담당한 간호사에 따르면 점심 식사 뒤 매점에 주스를 사러 가고 정신병동 로비에서 멍하니 마일드세븐 담배를 피우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위암 수술로 98년 가을 3개월간 병원을 떠난 외에 그의 인생은 병원을 못 벗어났다. 가족이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단 한명의 면회도 없었다.

간혹 흥얼거리며 한국 노래를 불러 인근 조선대학교로 데려가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걸게도 했지만 그의 입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자물쇠로 스스로 자신을 잠근 듯했다.

金씨는 죽어서야 '한국의 품'에 안겼다. 병원은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 처리를 도쿄도 고다이라(小平)시청에 맡겼고, 시청은 유골을 한국인 사찰인 국평사(國平寺)에 맡겼기 때문이다.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재일 한국인을 위해 65년에 세워진 절이다.

윤벽암 주지와 주지의 의뢰를 받은 법무사 하정윤씨는 金씨가 갖고 있던 외국인등록증의 본적지(경기도)를 수소문한 끝에 친동생(63)이 본적지에 살고 있음을 알아냈다.

윤 주지는 연락을 취했지만 동생은 "이렇다 할 묘지도 없어 유골을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다만 형의 호적을 정리하게 사망증명서만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윤 주지는 사망증명서를 차마 뗄 수 없었다. 그래 버리면 金씨의 '인생'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연을 접한 아사히신문은 기사 게재 허락을 얻기 위해 金씨의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동생은 지난 1월 "징병 가서 소식이 두절된 형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의 일은 완전히 잊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형의 한많은 삶이 제대로 밝혀지고, 형이 편히 잠들 수만 있다면…"이라며 허락했다. 金씨의 유골은 오늘도 국평사 지하 1층 납골실의 철제 벽장에 쓸쓸히 잠들어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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