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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간데없고 국민 지갑만 얇아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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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28면

21일 시중은행의 외환딜링룸은 난리가 났다. 아침 일찍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이 단기외채 문제를 언급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최 차관은 “단기외채가 최근 2년간 가파르게 늘고 있다”며 “원인을 분석하고 어떻게 억제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갈수록 꼬이는 환율 방정식

외화 차입이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우려에 원-달러 환율이 개장 초 12원이나 뛰었다. 하지만 장 후반 한국은행의 개입 물량으로 추정되는 5억 달러가 시장에 쏟아져나오면서 환율은 결국 전날보다 2원80전 떨어져 장을 마감했다. 한 외환딜러는 “한쪽에선 상승 사인을 내면서 다른 쪽에선 그러지 말라고 하니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르겠다”며 “일주일이 멀다 하고 튀어나오는 정책 노이즈(방해 요인) 때문에 시장이 노이로제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고무제품을 공급하는 D사는 요즘 환율 때문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주원료인 고무값의 국제시세가 올 들어 20% 이상 뛴 데다 환율 상승까지 겹쳐 구입 가격이 30% 이상 올랐다. 하지만 대기업으로부터 받는 납품 가격은 그대로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정부가 환율을 올려 돕겠다는 수출 중소기업이 과연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환율 방정식이 꼬여만 간다. 정책 당국인 재정부와 한국은행의 기 싸움이 석 달째 계속되고 있다. 재정부가 “경상수지 방어를 위해 원화가치가 떨어져야 한다”며 상승을 부추기면 한은이 물가 걱정을 하며 이를 막아서는 형국이다. 엇갈린 신호가 반복되면서 시장에선 정책 리스크가 최대 변수가 됐다. 3월 원-달러 환율 하루 변동폭은 10원80전으로 2001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현재 상황은 재정부의 판정승이다. 원-달러 환율이 올 들어 11%나 상승했다. 하지만 득보다 실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수출 증가가 투자나 일자리로 연결되는 현상은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물가 상승, 기업 환차손 증가 등 부작용만 두드러지고 있다.
 
엇갈린 사인
재정부와 한은의 갈등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됐다. ‘성장 전도사’인 강만수 장관과 ‘서민의 호민관’을 자임하는 이성태 총재의 소신이 곳곳에서 부딪쳤다. 강 장관은 취임 직후인 3월 초 “미국 등은 환율을 재무부에서 맡는데 한은의 권한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며 한은을 압박했다. 이 총재는 며칠 뒤 “우리나라와 미국은 상황이 다르다”며 맞받아쳤다. 보름 뒤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시급한 건 성장보다 물가”라며 한은 편을 드는 듯했다. 하지만 강 장관은 곧바로 “대통령의 말이 잘못 전달됐다. 경상수지 악화가 외환위기와 유사하다”며 환율 상승 필요성을 재강조했다. 3월 말 이 총재가 환율 천장 테스트론을 언급하자 강 장관은 “원화가치가 높아져 있어 환율이 올라야 한다”고 반격했다. 최 차관도 “급등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급락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들었다. 환율은 이들의 말이 알려질 때마다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다.

4월엔 긴장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1030원까지 올랐던 원-달러 환율이 1000원대 아래로 안정되자 한은이 재경부의 금리 인하 요구를 수용할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강 장관과 최 차관은 대신 은행을 표적으로 삼았다. 환율이 980원까지 떨어진 4월 초 최 차관은 “루머를 이용해 환율을 시세 조종한 세력이 있는지, 특히 대형 은행들이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급기야 지난달 16일 강 장관은 한 조찬 세미나에서 은행의 환헤지 상품을 겨냥해 “투기 세력보다 더 나쁜 건 지식을 악용해 시장 참가자들을 오도하고 돈을 버는 S(사기)세력”이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5월 들어 유가와 환율이 동반 급등하면서 재정부와 한은의 갈등이 다시 고조됐다. 강 장관은 6일 경상수지 적자 문제가 심각하다며 고환율을 감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틀 뒤 한은은 금리를 동결해 재정부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뒤 “물가는 유가 상승이 문제였지만 최근 환율 변수가 추가됐다”고 언급했다. 환율 상승세가 너무 빨라 물가 불안이 걱정되는 상황에서 금리를 내릴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강-최 라인’이 그 정도에 물러설 리 없다. 최 차관은 23일에도 “원화 고평가 정책은 지속가능하지 않고 이에 따른 후유증으로 리세션(침체)이 올 수 있다”며 고환율 필요성을 역설했다.
 
기대 이하 성적표

환율이 올라야 한다는 재정부의 논리는 단순하다.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 잘 돼 기업 이익이 늘고 일자리가 많아질 것이란 생각이다. 실제로 4월 수출은 1년 전보다 27% 늘어나 3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증가율도 지난해 12월 이후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 사상 최대 순익을 낼 것으로 전망되는 등 수출 대기업의 실적도 좋아지는 추세다. 하지만 여기엔 착시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실속 없이 장부상 숫자만 커지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경기전망에서 올 수출액 증가율을 당초 10.9%에서 18.1%로 상향했다. 하지만 물량 기준 상승률은 9.7%에서 10.1%로 그다지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자리도 환율 덕분에 개선됐다는 조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수출과 고용·내수 사이의 연결고리는 예전보다 많이 약해졌다. 1995년엔 수출이 10억원 늘면 고용이 26.2명 증가했지만 2003년엔 절반인 12.7명으로 낮아졌다. 사람보다 기계를 많이 쓰는 정보기술 업종의 비중이 커진 지금은 이보다 적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늘어난 수출도 환율 덕으로만 보긴 어렵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환율 상승이 곧바로 수출 증대로 이어졌지만 2000년대 들어 국내 기업들이 수출 지역을 다변화하고 품질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이 공식이 상당 부분 깨졌다”(이윤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는 지적이 많다. 환율이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던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이 이를 방증한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연 평균 원-달러 환율은 1191.85원에서 929.16원으로 22% 떨어졌다. 하지만 이 기간 중 수출은 오히려 1938억 달러에서 3714억 달러로 91% 늘어났다.

수출과 수입이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도 환율 상승의 효과를 줄이는 요소다. 관세청에 따르면 3월 수입액 368억 달러 중 40.2%인 148억 달러가 수출용이었다. 원화로 환산한 수출가가 높아져도 원자재 비용이 커지면 기업 이익 개선 효과가 상당 부분 상쇄된다. 지난달 수입 물가가 1년 전보다 31.3% 뛰어 수출 물가 상승률(15.7%)의 두 배인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중소기업에 도움이 된다”는 강 장관의 논리도 현실과 차이가 있다. 수출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원자재값 상승분을 대기업 납품가에 반영할 수 있는 중소기업은 거의 없다”며 “환율 상승의 과실을 대기업이 대부분 가져가며 중소기업은 더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대기업들도 환율 상승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기대 이상의 순익이 나 봐야 주식의 절반 이상을 갖고 있는 외국인 주주들이 배당 압력을 통해 상당 부분 뽑아갈 것이고, 노조는 노조대로 성과 배분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환율에 의존한 과도한 이익은 기업들의 연구개발 등 체질 개선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LG전자 남용 부회장은 이런 상황을 꼬집어 ‘나쁜 이익론’을 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얇아지고 있는 국민의 지갑이다. 지난해 연말 배럴당 90달러 수준에서 최근 130달러를 넘어선 유가가 대표적이다. 달러 기준 상승률은 44%지만 원화 기준으론 59% 상승했다. KDI는 최근 외환위기 이후 2.7% 안팎이던 물가가 최근 4.1%로 뛴 데엔 원자재값 상승(0.8%포인트)과 함께 환율 상승(0.5%포인트)이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장혁(경영학) 고려대 교수는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 증대로 성장률이 높아지지만 물가가 더 많이 뛰어 국민의 고통이 심해진다”며 “환율 상승의 효과는 일부 수출 대기업에 집중되는 반면 그 비용은 모두 국민 몫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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