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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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침 첫 비행기는 일곱시에 떠난다.택시타고 가겠다는 것을 아버지는 굳이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그 길로 곧장 농장으로내려가겠다며 함께 신새벽에 집을 나선 것이다.
서여사가 동해안에 같이 가자고 한다니까 아버지는 잠시 먼 데를 허허로이 바라보듯했다.서여사랑 정길례여사와 동행한 내장산 나들이를 추억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곧 밝은 표정을 되찾아 말했다.
『그래,넓은 바다를 맘껏 보고 오너라.』 아리영의 마음이 미스터 조를 「졸업」해가고 있음을 아버지는 아는 것같았다.민속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저녁 모임도 그래서 선선히 가졌을 것이다.
미스터 조로 인한 아리영과의 응어리는 아버지가 풀어야할 오랜숙제였다.그것이 아리영 자신에 의해 풀려가는데 아버지는 크게 시름 놓은 기분인지도 모르겠다.
자동차 뒷자리 등받이에 기댄채 돋보기 너머 신문 살피며 멀어지는 아버지 모습을 찡한 가슴으로 쳐다봤다.이 두어달 사이에부쩍 늙어보이는 것이 안쓰러웠다.
국내선 청사 커피숍엔 이미 서여사가 와 있었다.
『여기예요!』 손을 들어 반가이 아리영을 부른다.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서서 맞는다.그날 대문에서 마주친 하얀 레인 코트의 신사.역시 그는 서여사의 큰아들이었다.
『큰애예요.뉴욕 로 펌의 파트너로 있어요.일 관계로 잠시 귀국했는데 아버지 외가댁 산소에 성묘하고 묘비 탁본도 떠오겠다 해서 번거로운 부탁을 드리게 됐군요.』 서여사는 탁본뜨는 도구를 넣은 작은 가방을 들어올려 보였다.
우리말로 「법률주식회사」라고나 옮겨질 「로 펌」은 전문분야별변호사를 집단으로 거느리고 있는 대규모 법률사무소를 가리킨다.
미국에는 쟁쟁한 엘리트 변호사를 백명 이상씩이나 거느리는 로 펌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파트너」란 그 로 펌 의 「주주(株主) 변호사」를 말한다.자금이나 기술.능력을 공동출자한 변호사를 지칭하는 전문용어다.해외공관에서 경제담당 공사를 지낸 아버지를 통해 얻은 상식이다.
『안녕하십니까.초면은 아닌 것같습니다.』 서여사의 큰아들은 우렁우렁하나 낮은 톤으로 인사했다.
『초면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서여사가 되물었다.
『며칠전 대문에서….』 신사와 아리영은 동시에 같은 말을 꺼내다 서로 놀라며 또 웃었다.그날 대문 앞에서도 그랬었다.
이상한 직감으로 아리영은 가슴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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