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盧씨에 등돌린 "TK 정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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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검찰 출두 장면은 대구시민들의 정서를 묘하게 자극했다.
각종 비리와 엄청난 부정축재 혐의를 받고있는 전직대통령에 분노하지 않는 국민이 없겠지만 대구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TK(대구.경북)정서가 여지없이 짓밟혔기 때문이다.지난해 8월 치러진 대구수성갑 보궐선거 결과 현경자(玄慶子)씨가 당선되자 시민들은 『TK정서의 승리』라며 기뻐했다.김영삼(金泳三)정부가 들어선뒤 박철언(朴哲彦)씨를 비롯해 수많은 TK인사들이 줄줄이 거세되고 감옥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이 때 나온 말이 「TK정서」였다.YS가 3공화국 이후 줄곧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TK세력을 표적으로 삼아 사정(司正)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반사적인 지역감정이었다.
박계동(朴啓東.민주)의원의 盧씨 비자금 폭로때만 하더라도 『같은 고향 사람인 그를 우리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는가』라는 경상도식 의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적지않았다.
비자금 조성사실을 속이다 들통 났을 때도,낙향설이 나돌때도 그를 이해하고 껴안으려는 「TK정서」가 있었다.
그러나 쓰다남은 돈이 1,857억원이나 되고 투기의혹에 사채꾼이라는 보도까지 나오자 「TK정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급기야 1일 오전 盧씨가 검찰에 소환되는 장면을 보게되자 대구시민들의 감정은 참담함과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믿어 달라』던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한데 대한 동향인들의 분노다.
여론은 이제 완전히 그의 곁을 떠났다.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은 『경제를 일으킨 사람』으로,5.18의 주역인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에게도 나름대로 점수를 주려는 것이 대구사람의 인심이다.
하지만 이날 카메라앞에 선 盧씨의 모습은 TK정서가 그로부터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TK정서는 『그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만이 TK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TK자존심」으로 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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