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청바지] 스키니진과 분홍 땡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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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부터 불어 닥친 ‘스키니진’의 열풍. 여대생이라면 누구나 한 벌쯤 사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마른 내 몸 구조에 스키니진은 꽤 괜찮게 어울렸고 즐겨 입었다.

그러다 지난해 이맘때 한 가게에서 본 청바지에 필이 꽂혔다. 입어 보니 마음에 쏙 들었지만 30만원에 이르는 가격표를 보고는 쓰린 마음을 안고 나와야 했다. 그런데 며칠 뒤 인터넷에서 그것과 똑같은 일명 ‘○○스타일’ 바지를 발견했다. 가격은 4분의 1밖에 안 됐고, ‘정말 똑같아요’ ‘제 친구들도 모두 속았어요’ 같은 무수한 상품 평에 마음을 홀딱 뺏겨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1주일 뒤 겨우 도착한 청바지는 여기저기 실밥이 묻어 있고 주름이 많았다. ‘4분의 1 가격인데 그렇겠지. 다들 괜찮다고 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후다닥 입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약간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스키니진의 맛이 아닌가. 그 뒤 하루 걸러 그 녀석을 교복마냥 열심히 입고 다녔다. 청바지의 튼튼함과 세탁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믿고 여기저기 편하게 앉기도 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짝퉁’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어김없이 그 멋진 청바지를 입고서 말이다. 대화는 즐거웠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내숭도 열심히 떨었다.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기는데 소개팅 남자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더니 자신이 걸치고 있던 윗옷을 벗어 내 허리춤에 묶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놀라며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혹시 추울까 봐 그랬나 싶다가 왜 하필 허리춤에 묶어 줬을까, 변태인가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기에 함께 식당으로 갔다. 밥을 먹으며 신나게 떠들다 집 앞까지 데려다 준 그는 옷은 내일 달라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한 뒤 옷을 벗다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멀리 거울에 비친 내 엉덩이에 분홍색 땡땡이가 보이는 게 아닌가. 너무 열심히 입어 청바지에 구멍이 난 것이다. 그가 계단을 앞서 오르던 내 엉덩이의 분홍 점들을 보고 자기 옷으로 가려준 것이다. 역시 4분의 1 가격은 이유가 있었다. 자랑스러웠던 청바지는 순간 수치스러운 청바지가 됐다. 그러나 그와는 연인이 됐고, 지금도 그는 분홍색 땡땡이를 보고 반했다며 나를 놀린다.

박주희(25·부산시 사하구 다대2동·수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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