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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가 회고한 고 박경리 선생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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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정녕 가셨습니까. 선생님이 하루를 못 넘길 정도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비록 의식은 없으셨지만 손은 말랑하고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평소 유난히 손이 찬 저는 그날은 마음까지 시려서 차갑게 경직된 두 손으로 선생님의 따슨 손을 마냥 조몰락거렸습니다. 제 언 손을 녹이고자였습니다. 그리고 따님에게 위로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이렇게 손이 더운데 쉬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장담을 했지요. 실은 두려워서 떨리는 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는 선생님의 따슨 손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을 뵐 때마다 뭔가를 얻어가져 버릇해서, 빈손으로 고독하게 이 세상과 하직할 준비를 하고 계신, 그 절체절명의 엄혹한 순간에도 선생님의 마지막 체온이라도 탐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참람한 마음이 듭니다.

선생님은 제가 원주에 갈 적마다 뭔가를 먹이지 못해 하셨고 돌아올 때는 선생님이 손수 가꾸신 걸 아낌없이 구메구메 싸주셨습니다. 김장이나 된장은 선생님을 믿고 아예 담그지 않았고, 일부러 감자 캘 때나 옥수수 익어갈 때를 맞춰 가서 바리바리 얻어다가 자식들하고 나누기도 했지요.

단구동 댁 마당에서 해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던 여러 그루의 대추나무와 그 틈에 뱀이 산다는 돌무더기들, 문화관이 있는 매지리 댁의 잘 생긴 간장 된장독이 즐비한 장독대는 언제 꺼내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그리운 고향집의 흑백사진입니다.

단구동 댁에서 선생님은 장장한 대하소설 토지를 완간하셨을 뿐 아니라 그 큰집의 살림과 손님대접, 채마밭 가꾸기, 고양이 밥 주기 등을 다 손수 하셨지요. 대작을 쓴 곳이라곤 믿어지지 않게 별 볼 것 없는 소박한 집필실보다는 이층 베란다 난간에 즐비하게 널려있던 황토 빛이 밴, 셀 수 없이 많은 면장갑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렇게까지 하실 게 뭐 있나, 대충 사시지. 이런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단구동 댁의 으뜸 효자는 아마도 대추나무였을 겁니다. 사람 손이 덜 가고도 풍부한 열매를 맺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걸 즐기시는 선생님을 흡족하게 해드렸으니까요. 가을이면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르던 지인 후배들은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계절인사처럼 잘 익은 대추를 한 보따리씩 선물로 받곤 했지요. 그 대추나무들이 돌림병으로 죽은 것과 ‘토지’ 완간 기념 잔치를 성대하게 연 것과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집에서는 어차피 큰일과, 작은 일, 기쁜 일과 언짢은 일이 번갈아 가며 일어나게 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지금도 단구동이 그리운 것은 대작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비롯해서 우리 문단과 문학 애호가들이 공유하는 크고 작은 사건의 현장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적인 저 혼자만의 추억 때문입니다.

제가 죽을 것처럼 힘들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세상을 안 볼 것처럼 자신 안에 꼭꼭 칩거해 있을 때 저를 반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건 한국일보 장명수 사장이었을 겁니다. 그 최초의 외출이 단구동 선생님댁이었습니다. 김성우 논설위원도 같이였구요.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무작정 간 게 아니라 선생님이 그렇게 시키셨겠지요. 손수 지으신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때 선생님이 지으신 따슨 밥과 배추속대국을 눈물범벅으로 아귀아귀 먹게 하신 선생님의 사랑인지 우격다짐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다. 잊어버리면 사람도 아니지요. 대범한 줄로만 알았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내보이신 따뜻한 속 정에 저는 비로소 버림받고 헐벗은 채 친정으로 돌아온 딸처럼 마음 놓고 울었다 웃었다 술주정까지 했었지요. 그리고 다시 선생님이 제 등을 떠미시니 바깥세상으로 나가기가 한결 수월해지더이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외동딸은 아니었나 봅니다. 단구동 댁을 기념관으로 내주시고 더 큰 터전을 잡아 매지리로 거처를 옮기실 때 후배 작가들이 머물며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문화관을 따로 지으셨습니다. 사랑하는 후배에게 어떻게든 무공해 채소와 집 밥을 먹이고 싶어하신 모성애를 못 이겨 아예 하숙비 없는 하숙집을 차리셨습니다. 외딸인 줄 알았다가 졸지에 여러 동생을 보게 된 저는 한때는 속으로 은근히 삐치기도 했지요. 얻어올 수 있는 게 텃밭에서 나는 채소에다가 오봉산에서 나는 오가피나 두릅 취나물 등으로 늘어나긴 했어도 더는 선생님이 지으신 집 밥은 얻어먹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아우들이 조롱조롱 생겼는데 맏이는 젖이 떨어질 수밖에요. 선생님의 그늘에서 문화관 밥과 무공해 채소라도 얻어먹어야만 힘이 날 것처럼 속이 비고 허전할 때면 저도 문화관 식구가 되어 선생님의 공짜 밥을 얻어먹어 버릇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대신 해주는 밥이지만 식탁에 선생님이 손수 가꾸신 채소가 떨어지지 않는 한 문화관 밥은 집 밥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제가 단골로 쓰던 문화관 삼 층 끝 방에서는 선생님의 텃밭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매고 거두시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철이 난 것처럼 흙에서 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생명줄인지를 깨우쳐갔지요.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한다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밭에 엎드려 김을 매고 있는게 아니라 경배를 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땅에 대한 경배가 곧 농사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입으로 하는 직업적인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천성의 농사꾼이셨습니다. 사실, 땅이 거저 이자를 붙여줍니까. 인간의 피땀과 등골을 있는 대로 빼먹어야 거기 합당한 이자를 붙여주는 게 땅 아니던가요. 그래서 사람들은 땅의 그런 느리고 인색한 보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까짓 땅 기운을 아예 시멘트로 틀어막고 아파트를 지어 큰 이익을 남기게 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은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 늘 못마땅해 하시면서 분개도 많이 하셨죠. 선생님은 자연 숭배자셨습니다. 어떤 권력자나 재력가 앞에서도 당당하고 거침없이 할 말 다하시던 선생님이셨으나 자연 앞에서는 한 없이 작고 겸손해지셨습니다. 댁에 늘 문화관식구들이 먹고 남을 만큼 먹을 것이 넘치는 게 다 오봉산 덕이라고 문화관을 품고 있는 산한테까지 그 공을 돌리고 두 손 모아 경배하는 걸 뵌 적도 있습니다. 어찌 산과 들에서 나는 것뿐이겠습니까. 선생님이 몇 년 전 고향 통영을 방문하고 돌아오신 후에는 통영시장을 비롯한 통영 시민들의 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극진하여 늘 귀한 해산물도 보내오는 듯했습니다. 제가 원주에서 얻어올 수 있는 먹을 것도 다양해졌습니다. 내륙에서 자란 저는 생선이름도 몇 가지밖에 모르는데 특히 뽈락이라는 작은 생선은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거였습니다. 뽈락 젖을 넣고 담근 김치 또한 생전 처음 먹어보는 별미였구요.

어느 핸가 명절을 앞두고 있어 우리도 뭔가 작은 선물을 사 가지고 갔는데 선생님댁 주방과 거실에는 과일 떡 등 먹을 것이 넘쳐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문화관 식구들을 잘 먹일 수 있어서 어떤 선물보다도 먹을 것이 제일 반갑다고 인사 치레를 하시고 나서 주방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쌀독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난 저 쌀독만 있으면 돼. 저 많은 먹을 것들이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끼니때 쌀독에서 쌀을 한 줌씩 내다가 한 톨이라도 바닥에 떨어지면 엎드려서 손가락 끝으로 찍어 담아야 마음이 편해.”

어려서 집이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는데도 우리 엄마는 약간 맛이 간 쉰밥도 버리지 못하고 물에 씻어서 당신 혼자서 드셨습니다. 제가 질색을 하고 말리면 ‘밥이 아까워서 못 버리냐? 하늘이 무서워서 못 버리지’ 하시던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돈으로 치면 몇 푼 안 되는 푸성귀를 얻기 위해 땅을 기던 선생님, 쌀 한 톨을 위해 부엌바닥을 기던 선생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작년 선생님의 마지막 생신 때 생각이 납니다. 그때 우리는 (현대문학 양숙진 주간과 저) 그게 마지막 생신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했습니다. 따님을 통해 선생님은 치료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무도 당신 병을 아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걸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건강한 척은 완벽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줄 담배까지 피우셨으니까요. 딴 생신 때와 달랐던 것은 우리가 원주로 가지 않고 선생님이 서울 오신 김에 생신을 핑계로 식사자리를 마련한 거였습니다. 남산의 힐튼호텔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전해들은 선생님의 암은 오진일 거라는 확신이 들 만큼 선생님의 식욕은 평소와 다름이 없으셨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혜안도 여전하셨습니다. 누가 버릴 세상에 대해 그런 애정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그날 모임의 압권은 호텔 앞에서의 노느매기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생신을 빙자한 저희의 식사대접 자리에 오시면서도 빈손으로 오시지를 않고 또 원주에서 난 것, 통영에서 부쳐온 것들을 구메구메 챙겨 오셨습니다. 우리 속물들은 국산차만 타고 들어가도, 소형차만 타고 들어가도 주눅이 들것처럼 럭셔리한 것으로는 서울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특급호텔 현관에다가 온갖 촌스러운 것들을 풀어놓고 양 사장 몫과 제 몫으로 나누어 차에 실어주신 선생님 때문에 그날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통쾌하고 으쓱했는지요. 그 거침없으심은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러웠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갑자기 이 세상을 버리시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시니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일도 이렇게 옛이야기하듯 하게 됩니다.

생전에 소원하신 대로 선생님은 원주를 거쳐 고향 통영의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원주까지만 선생님을 배웅하고 통영까지는 모시지 못했습니다. 원주에서 통영까지 차로 간다는 건 제 몸에 너무 눈치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이승이니까요. 건강상의 이유 말고도 선생님은 원주에 계셔야할 것 같은,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영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거라면 원주에 더 많이 계실 것 같은 미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원주에서는 단구동 기념관에서 원주시민들의 진정 어린 애도의 자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매지리 문화관에서 노제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영영 원주를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을 배웅하고 나니 노제 지낸 제상만 뎅그머니 남아 있더군요. 누군가가 큰 병에 반 넘어 남아있는 백세주를 따라 마시고 있기에 저도 한잔 달라고 했지요. 한두 잔 얻어 마시고 나서 안주를 집으려고 보니 먼저 메밀 부침개가 눈에 들어오지 뭡니까. 당장 입에 침이 고여 얌전하게 네모로 접어 괴놓은 부침개 한 자락을 맨손으로 찢어서 입에 넣었습니다. 딱 그 맛이었습니다. 선생님하고 자주 가던 고사리 식당이던가요, 개 건너 집이던가요, 아니면 이름은 잊었지만 부부가 다 착하고 진국이라고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길가 식당이던가요. 그런데서 먹어보고 집에 싸 가지고 오기까지 하던 딱 그 메밀부침 맛이었습니다. 거의 투명할 정도로 얇게 부쳐 도리어 메밀의 깊은 맛을 극대화한 부침개 맛은 술을 더 먹고 싶은, 술 허기증 같은 걸 걷잡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것도 술은 꼭 소주여야 할 것 같은. 그 자리에 소주는 없었으므로 우선 먹던 부침개라도 싸 가지고 올 요량으로 주춤대다가 제 주접떠는 모습을 이혜경 작가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 작가가 부침개는 자기가 얻어 가지고 갈 테니 저더러는 그 아래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데였지만 문화관에서 가장 가까운 데였습니다. 문화관에 묵고 있던 작가들을 비롯해서 통영까지 못 간 몇몇 작가들이 노제 후 거기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 돼있었던 듯, 오정희 작가 이강숙 총장을 비롯해서 젊은 작가들이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나중에 나타난 이혜경 작가는 메밀부침을 얻어오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집에서 안주로 그걸 시켰지만 그 맛이 아니었습니다. 상관없었습니다. 소주가 있었으니까요. 작은 식당이라 맥주는 곧 떨어졌지만 소주는 넉넉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맥주에 소주를 타 마셨지만 저는 순전한 소주를 고집했습니다. 소주 기운이 돌자 여태까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한 번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한이 제 한이었던 곡절까지 매듭이 풀리듯이 허술해졌습니다. 선생님은 마침내 자유로워지셨구나. 부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맺힌 슬픔, 의지가지없이 허전한 마음이 헐렁해지자 우리는 찍찍 허튼 수작까지 날리며 희희덕댈 정도로 편안해졌습니다.

생각해보니 선생님과는 한 번도 허튼 수작을 해본 적이 없네요. 농담 한번 안 하고 이 풍진세상 그 힘든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선생님이 가여워졌습니다. 이런 걸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연민이라 한다면 너무 외람될까요.

선생님 가신 후에도 문화관은 이어지겠지만 손수 가꾸신 채소를 다시 얻어먹을 수는 없겠지요.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거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뤄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학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기신 토지에는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세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고귀한 인간성으로부터 바닥 상것의 비천함까지 천태만상의 인간군상이 총망라되어있습니다.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 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기고 하는 게, 마치 지류(支流)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드린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선생님, 우린 오래오래 두고두고 그 큰 강가에서 목도 축이고 필요한 양분도 취하면서 번성할 테니 천상에서 지켜봐 주시고, 저것들이 내 하숙 밥 없이도 잘만 크네, 흐뭇하게 미소지어주시길. 문화관의 맏이 박완서 두 손 모아 빌며 선생님을 전송합니다.

- 이 글은 박경리 선생님 영결식에 받친 조사에다가 그때 시간상 못 다한 이야기를 보탠 글임을 밝힙니다. -

[현대문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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