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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대통령비자금>6.끝.야당에 흘러간 검은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역대 여당대통령이 여권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주어온만큼 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대선자금을 받았을 것이다.또 야당지도자에게도선거자금을 줬을 수도 있는만큼 이 부분도 밝혀야 한다(민자당 金潤煥대표).』 『몇번 거절했으나 한 비서관이 찾아와 순수한 인사차원이라고 해서 20억원을 위로금 명목으로 받았다(국민회의金大中총재).이제 金대통령도 盧씨로부터 얼마를 받았는지 밝힐 때다(국민회의 朴智元대변인).』 이 두 발언은 서로 공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민자당 金대표가 한 말에는 「야당이라고 깨끗한것은 아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그러자 국민회의는 「우리는 소액에 불과했다」고 되받았다.이처럼 盧씨 비자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상호 폭로전으로 얼룩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대통령의 야당에 대한 자금지원이 새로운 얘기는아니다.그 연원은 3공때부터 비롯됐다.오염의 근원은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정보.공작.금권정치였다.정통성 없던 정권은 야당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으로 돈줄을 죄었다 .
재미있는 것은 정치자금법.이 법은 그 골간이 65년에 제정됐다.다시말해 朴전대통령이 만든 법이다.정치자금의 양성화가 취지였다.이 법은 정치자금의 유일한 수단을 기업인의 기탁금만으로 제한했다.그러나 79년 10.26까지 모금된 기■ 액 총액은 18억원.1년에 1억원 조금 넘는 돈이 여야의 합법적인 자금의전부였다.
결국 철저한 정보정치 아래에서 여당은 물론 야당도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제공하는 정치자금에 당 운영의 상당부분을 의존해야했다.이같은 관행은 야당 내부를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었고 사쿠라 논쟁을 끊이지 않게 했다.여야영수회담이 있고 나면 『얼마를받아나왔다더라』는 의혹이 비주류로부터 제기됐다.
권력자가 이처럼 돈으로 야당을 조종하는 관행은 6공까지 근절되지 않았다.초기에는 수동적이던 야당이 후에는 적극적으로 손을벌리기도 했다.선거마다 금권이 난무하고 당권경쟁에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야당은 경륜과 인품이 아닌 자금동원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하게 됐다.
이중 김영삼.김대중 두金씨만이 비교적 권력자의 유혹에 완강히저항할 수 있었다.이 부분에 대해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민정당의원들과 만나 『야당으론 기업자금이 가려야 갈 수 없다.일부 정치지망생이나 소문 안내고 돈많은 사람한테서 조달한다』고 말한바 있다.대신 두金씨는 이같은 능력을 바탕으로 당을 사당화(私黨化)해나갔다.
정권은 입막음조로 야당에 기업의 돈이 조금 흘러들어가는 것을용인할 때도 있었다.수서사건때 쓰인 한보비자금의 총액은 100억원대였다.이중 평민당에는 2억원이 건네졌다.당시 평민당은 이돈을 연말 망년회에서 의원들 부인에게 200만 원씩 나눠줬다.
대통령의 비자금은 야당내부의 공정한 경쟁까지도 왜곡시켰다.야당은 그 대가로 정권교체의 꿈을 포기했다.권력에 대한 비판을 완화했다.대신 지도부는 다른 정파의 도전으로부터 당권을 방어하는데 권력자로부터 받은 돈을 활용했다.이번의 비자 금 파문에 야당가가 술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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