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씨 비자금 파문-사과성명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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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대국민사과의 결심을 최종적으로 굳힌것은 26일 오후.
이날 연희동을 찾은 정해창(丁海昌)전비서실장.최석립(崔石立)전경호실장등 측근들의 계속된 조기사과 건의에 盧씨는 결국 『27일 오전 발표할 사과문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당초 盧씨는 조기사과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으나 盧씨의 부인 김옥숙(金玉淑).아들 재헌.딸 소영씨등 가족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 결심을 미뤄왔다는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날 여기저기에서 비자금이 추가로 드러나고 여권에서「사법처리 불사」얘기가 나오자 盧씨는 물론 가족들의 분위기도 완연히 수그러들고 말았다.
盧씨의 주문에 따라 丁.崔씨와 박영훈(朴永勳)비서실장등 盧씨의 최측근 7명은 26일 밤부터 27일 아침까지 평창동 라마다올림피아호텔에서 철야작업으로 문안을 작성.
파문에 대한 부정적 여론 때문인지 3명을 제외한 작성팀은 자신들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 극도의 보안을 유지.
작성팀은 비자금내용공개의 범위,盧씨의 향후 거취,대국민사과의수위등을 무척 고민했는데 사죄의 뜻을 강하게 하기 위해 사과문첫머리에 『못난 노태우』라는 자학적 표현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조정이 어려웠던 부분은 현재 남아있는 비자금의규모.盧씨의 한 측근은 사과문 발표 몇시간전에 『1,000억원플러스 알파』라고 귀띔했는데 나중에 盧씨가 직접 공개한 액수는1,700억원이었다.
작성팀은 또 남은 비자금의 처리방향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논의.
측근들의 작업에서는 「헌납」이란 용어는 피하되 『남은 정치자금을 (국가에) 모두 환원한다』는 문구를 집어넣자는 의견이 제시됐는데 실제 발표에는 등장하지 않았다.盧씨는 대신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말해 헌납.몰수등 정부의 조초 에 순응할 뜻을 포괄적으로 표명.
반면 측근들이 강력히 요구한 『검찰출두도 받아들인다』는 부분에 대해 당초 盧씨는 거부의사를 밝혔으나 실제 사과발표에선 『필요하면 당국에 출석해 조사도 받겠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들어가 막판까지 「수위조절」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
…盧씨가 1,700억원이 남게된 명분으로 내세운 「중립내각」부분도 당초문안에는 『중립내각이 등장해 모아둔 돈을 쓸 수 없었고 새정부들어 개혁과 실명제로 공개시기를 놓쳤다』고 상세히 설명되었으나 궁색하게 비쳐질 것을 우려한듯 짤막한 문장으로만 처리됐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야당에 대한 대선자금지원,비자금제공 기업명등에 대해선 盧씨가 『혼자만의 책임』을 일찍 결심해 작성작업의 초기에 거론하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측근은 『모든 처벌을 감수한다고 천명한 것이 중요하다』며 盧씨의 거취에 대해 『결국 대통령 귀국후 어떤 형태로든 구체적 윤곽이 그려지지 않겠느냐』고 언급해 盧씨측이「사법처리」의 수준등에 기대를 갖고 있음을 암시.
사태의 초반부터 대책마련에 착수했던 서동권(徐東權)전안기부장은 26일 밤 자택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가 새벽에 문안작성에참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徐씨는 『사과발표등에 여권으로 부터 주문과 접촉이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22일 민자당 김윤환(金潤煥)대표가 얘기한 것도 여권의 공식적인 제안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날 시내호텔에서 우연히 金대표를 만났는데 그가 「문제가 너무 심각해 盧전대통령이 낙향하지 않고 되겠느냐」는 얘기를 했던 것일뿐』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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