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박정희 경제계획'은 滿鐵이 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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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철을 시속 100㎞ 속도로 달리던 특급열차 ‘아시아’.

"기차 바퀴가 궤도에 갈리는 소리조차 유쾌한 음악을 듣는 듯하고, 철교를 건너갈 때와 굴을 지나갈 때에 나는 소요한 소리(굉음)도 이형식의 귀에는 군악과 같이 들린다.… (이제) 머리에 흰 댕기를 드리고 짚신을 신은 소년은 이미 죽었다. 뺑하는 화륜선을 볼 때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 소년의 껍데기에 전혀 다른 이형식이라는 사람이 들어앉았다."

일제 초기에 등장한 기차 앞에 사람들은 압도됐지만, 그 충격은 짚신 신은 조선 소년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둔갑시킬 정도였다. 그게 소설 '무정' 에서 묘사한 춘원 이광수의 증언이다. '만철'을 보니 그건 약과였다. 1934년 일제 총독부는 한반도에 특급열차 '히카리(빛)'를 투입했다. 부산과 신의주를 거쳐 만주 펑톈(奉天)까지 시속 49㎞로 달리며 또 한번 조선 사람들의 얼을 뺀 것이다.

당시 일본의 초고속 특급 '쓰바메(제비)' 는 67㎞. 이들에 비해 '광속'이었던 게 만철을 달리던 '아시아'였다. 다롄(大連)과 신장(지금의 長春)구간을 시속 100㎞로 오가던 유선형의 대단한 증기기관차였다. 그게 이 책이 다루는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역사의 일부다. 따라서 '만철'은 1906년부터 1945년까지 만철 왕국 39년 역사를 더듬는 썩 요긴한 기록물로 다가온다.

그러면 왜 만철왕국으로 불릴까? 자본금(2억엔) 기준으로 당시 일본 최대 회사여서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당시 만철은 '유럽으로 열린 창'. 일본인들이 유럽으로 가려면 시모노세키에서 연락선 '나나빈'을 타고 부산에 도착해 히카리에 올라타면 됐다. 만주~모스크바는 11일, 베를린과 파리는 14일이면 됐다. 따라서 한반도는 그 코스의 길목이었다. 1905년 일본이 깔아놓은 경부선.경의선은 만철과 한 덩어리였던 셈이다.

아이러니인 점은 2000년대 만철이 '역사 복기(復棋)'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러시아 서쪽 1만㎞를 잇는 물류 대동맥으로 구상되고 있는 유라시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 철도(TKR) 프로젝트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 먹고 먹혔던 관계 속에서 태어난 '사생아 만철'을 새 세기 '상생의 철(鐵)실크로드'로 어떻게 바꿔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만철'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만철'은 '현대사의 밑그림'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탄생한 '자궁'이 바로 만철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즉 만철은 '만주=중공업 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진행시켜 대규모의 쇼와 제강소를 키웠던 핵심 지휘탑이기도 했다. 젊을 적 만주에서 군인 생활을 했던 박정희는 만철의 프로그램을 알게 모르게 차용 내지 모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쇼와'는 포스코의 모델일까? 그 점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 우선 장점. 부제가 암시하듯 '만철'은 철도사는 물론 이 철도를 둘러싼 일본의 싱크탱크인 조사부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꽤 입체적인 서술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술에 깊이가 덜하다. 이 엄청난 역사의 덩어리를 효과적으로 소화하기에는 저자의 역량이 다소 달린다 싶다. 밀도도 아쉽다. 이걸 채워야 할 것은 국내연구자들의 몫일 터인데….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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