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씨 비자금 파문-6共청산 신호탄인가 手順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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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거액 비자금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6공청산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철저한 수사』지시가 「6공청산의 신호탄」이 아니냐는데서부터 「청산의 수순(手順)」에까지 갖가지 전망이 불 거져 나오고있다.여권 일각에서조차 5공청산 당시 전두환(全斗煥)씨의 대국민사과-재산헌납-백담사행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특히 철저수사를 지시한 김대통령이 『문민정부는 국민의 도덕적신뢰와 바탕위에서 탄생됐다』고 정권의 도덕성을 유독 강조한 사실은 비리로 얼룩진 5공과의 차별화를 위해 6공이 결국 5공청산에 나섰던 당시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노 전대통령측도 대국민사과-재산헌납-낙향(落鄕)과 아들 재헌(載憲)씨의 지구당위원장 사퇴등 최후의 선택을 위한 초읽기에 들어가 긴장된 분위기로 알려졌다.
결국 어떤 수순을 밟아 이번 비자금 파동을 마무리짓느냐인데 결국 그 원형을 5공청산 방식에서 따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권에서는 노씨측이 비밀계좌를 완전히 공개한뒤 국민에게 사과하고 그뒤에 은둔등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어물쩍 처리했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바닥세에 있는 민자당의인기를 더욱 끌어내려 결국 내년 총선에서 완전한 패배로 끝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5공청산 당시는 물론 현정국과는 다른 정치적 요인을 갖고 있었다.바로 88년 4.26총선으로 형성된 「여소야대(與小野大)」정국이다.돌아온 3김은 『5공 청산』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야당은 5공의 비리를 부각시켜 『6공도 결국은 한 통속.한뿌리』임을 강조,정국 주도권을 장악해나가려는 심사였다.여소야대가 만들어낸 그해 11월의 5공청문회 정국은 이번의 「비자금파문」처럼 5공청산의 기폭제가 됐다.
야당의 강공에 몰리다 못한 노대통령은 『갈라서야 산다』는 판단아래 11월 『대국민사과-재산헌납-은둔』이라는 제안을 전씨측에 던진다.전씨측의 반발이 일자 『사법처리는 물론 국회증언대에서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고 전씨측의최후응낙을 받아냈다.
당시 재산헌납을 둘러싸고 『89억원 이상은 없다』는 전씨측과『국민정서상 150억~200억원은 돼야한다』는 청와대측의 갈등은 청와대에서 50억원을 얹어주는 「잔꾀」로 풀어나갔다.전씨가139억원과 함께 헌납한 연희동주택등은 6공에 서 『법적하자가없는 개인재산이므로 추후 돌려준다』는 사전합의 결과였다.
당시 전대통령은 자금은 만기가 돼야 찾을 수 있는 단기성 예금통장에 분산시켜 89억원을 모두 헌납하는데 2개월이상 걸리기도 했다.5공청산은 89년 12월 전 전대통령의 국회증언대 출석으로 마무리됐다.백담사로 떠날 때의 약속을 깨고 「국회증언」을 6공이 요구하자 전씨는 격노했으나 노대통령의 전화설득에 「국회에서의 수모」를 수용하고 말았다.
이같은 일련의 5공청산 상황에 비춰 6공청산은 청산의 실마리발견(5공의 각종 비리와 6공의 비자금),국민의 분노,현정권의단호한 태도라는 점에서 높은 개연성을 갖고 있다.
6공청산의 경우 역시 노씨 자신의 대국민사과.재산헌납등으로만수그러들지 않을 수 있다.특히 율곡.상무대.골프장비리등 6공비리의 전모가 드러날 경우 6공 고위권력층에 대한 사법처리도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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