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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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3월28일 헨리 키신저는 런던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은유럽과 특수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앞으로 유럽의 주요 국가들간에는 전쟁이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아시아지역 국가들 사이에는아직도 심각한 상호 불신과 갈등구조가 엄존하고 있다는 것이 키신저의 관찰이다.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 정세를 보면 마치 키신저의 주장을 입증이라도 하듯 동북아 국가들간의 뿌리 깊은 상호 불신을 노정시 키고 있다.
한-일간의 공방전은 10월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가 일본 국회에서 한일합방은 적법했다고 발언함으로써 시작됐다.한국측은 일본의 과거인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현재 일본정부의 대북한 자세까지 공개적으로 공격했다.일 본측은 과거문제에 대해 한국측의 입장을 다소 고려한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한일합방의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기본입장에서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우연인지는 몰라도 한국지도층은 일본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대북한 정 책에 대해서도 불만을 공개적으로 터뜨렸다.물론 한국정부가 자신의 동맹국과 중요 우방의 정책을 동시에 공개적으로 공격한데는 그럴만한 이유와 계산이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결정을 하게 되었는가 하 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이 시점에서 일본이 그들의 과거인식을 진정으로바꿀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독일과 일본의 과거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탐구하고 있는 네덜란드 언론인 이안 부루마(Ian Buruma)는 그의 저서 『죄의 보상(The Wages of Guilt)』에서 독일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함으로써 과거를 직시할 수 있었지만,일본은 일본역사의 단절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군국주의 시대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일합방을 포함해 일본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 지도층의 인식문제는 본질적으로 우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일본 자신에 관한 문제라고 봐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도 단순할 순 없다.원래 국가간 관계에서는 이익의 완전일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법이다.구체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의 정치적 통일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한다.만일 미국이 우리의 통일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라고 해서 실망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미국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우리는 성숙해야 한다.비현실적인 기대는 실망만을 초래할 뿐이다.주어진 현실의 조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그리고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가장 시급한 국가목표는 한반도에서평화를 확보하는 일이다.중국의 경우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화궈펑(華國鋒)은 마오 사망 3년후 실각했지만 북한도 권력승계는 간단하지 않을 것 같다.이런 과정에서 북한 이 군사적 모험주의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책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미국.일본등은 앞서 지적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불안정을 방지하는데 가장 큰 관심이 있다.따라서 한국은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미국.일본,나아가서는 중국.러시아등과도 정책의 조화를 확보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다만 동북아국가들의 대북한 정책 조화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뚜렷한,그리고 현실적인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대외정책은 일방적 소원의 표현도 아니며 솔직한 감정의 표현은더욱 아니다.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차선의 선택과 불가피한 타협을 요구한다.성숙한 민족은 이상과 현실,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 사이에서 세련된 균형감각을 가지고 꾸준히,그러나 서두름없이 자신의목표를 향해 전진해 간다.
(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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