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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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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늘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85일째 되는 날이다. ‘벌써 85일’보다 ‘겨우 85일’이라는 반응이 더 많을 법하다. 거듭된 인사 잡음에다 광우병 논란을 계기로 돌아앉은 민심은 그렇게 무섭도록 변했다.어릴 적 할머니 얘기를 빌리자면 매는 몰아서 맞는 게 낫다.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문제를 놓고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미국이 다음달부터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40만t, 미국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10만t 등 모두 50만t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정하면서부터 그렇다. 북핵 신고를 계기로 북·미 관계가 급진전한 결과다. 그러자 정부가 뒤늦게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명분을 찾느라 분주하다.

“정부는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고려하면서 대북 정책을 추진해 나갈 생각이다”(15일·김하중 통일장관)→“북한하고 기회가 되면 식량 문제에 대해 직접 협의를 할 생각이다”(15일·유명환 외교장관)→“인도적 지원은 여건이 갖춰지면 핵문제와 관계없이 해야하지 않나 생각한다”(16일·이 대통령)….

새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ABR(Anything But Roh·노무현 정부와 반대라면 무조건 괜찮다)’에서 출발했다. 기자가 임의로 정의한 게 아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공공연히 나돈 얘기였다. 인수위에 이전 정부의 업무를 인계하러 간 외교안보 부처의 한 관계자가 시간을 하도 안 내줘 복도에서 약식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는 ‘퍼주기’라는 비판과 함께 중단됐고, 남북 관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대신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0년 안에 북한 주민의 소득이 1인당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한다는 ‘비핵·개방 3000’이 실용 외교란 이름으로 대북 정책의 골간이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핵·개방 3000’은 한국 외교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개방하지 않는 한 정부가 할 일은 없는 셈이다.

그러는 사이에 북한은 미국 쪽으로 옮겨갔다. 믿었던 미국도 북한이 핵 신고와 관련해 보이는 적극성을 반가워해 북한을 향해 쳐놓았던 담장의 벽돌을 하나둘 들어내고 있다. 북한을 대상으로 한 한국 외교가 갑자기 외로워진 모양새다. 불행을 예고하는 징후는 많았다. 9200여 자 분량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남북 관계와 관련한 대목이 300여 자에 불과했을 때가 그랬고, 통일부를 없앤다고 할 때가 그랬고, 새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업 중 북한문제 전문가가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때가 그랬다.

잘못된 정책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전 정부가 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 부인하고 반대로만 가는 건 이념이지 정책이 아니다. 청와대 수석들 인사가 끝난 뒤 이전 정부에서 썼다는 이유로 ‘로드맵’이란 단어를 안 쓰기로 했다는 브리핑을 한 일이 있다. 단어는 안 써도 된다. 하지만 대북 정책의 로드맵은 지금부터라도 정밀하게 다시 손을 봐야 한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더! 정책을 바꾸거나 없던 정책이 만들어졌을 때 국민에게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다.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 뒤 “양국 대표들이 밤새워 협상했다고 들었다. 새벽에 두 사람이 잠결에 합의한 것 같다”는 대통령의 조크 뒤에 협상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이 보태졌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지난주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혼자 실없이 웃은 일이 있다.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23%로 또 떨어졌다는 기사에 붙은 댓글 때문이었다. 댓글은 이랬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노무현이 싫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이명박을 찍은 결과다’. 어쩌면 이 정부의 대북 정책을 책임지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마음 속의 댓글을 달려고 할지 모르겠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와 반대되는 정책을 찾으려다 보니 이렇게 됐다’.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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