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독선과 아집을 벗어던져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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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07면

강연장에 들어서는 이중톈(易中天·61) 교수는 중국 무협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외모는 부드러웠지만 말하는 속내는 단단했다.
즐겨 입는 중산복(일명 마오쩌둥 복장)을 반듯하게 여민 그는 회갑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싱싱하고 활기찼다. 15일 오전 한국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포럼 ‘『삼국지』를 다시 말한다’(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주최)에 연사로 초청돼 ‘나는 왜 이 시대에 『삼국지』를 다시 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그는 중국이 자랑하는 갑부 학술 스타답게 느긋하면서 느른했다.

서울국제도서전에 온 중국 저술가 이중톈

전날 도착해 서울 코엑스에서 개막한 ‘2008 서울국제도서전’ 중국 주빈국 대표단으로 바쁜 일정을 보낸 그는 별 준비 없이 오른 연단에서 특유의 달변으로 500여 명 청중을 사로잡았다.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사회로 열린 ‘『삼국지』 포럼’은 중국과 한국의 『삼국지』 전문가로 손꼽히는 이중톈 교수와 이문열씨가 한자리에서 『삼국지』를 논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삼국지』의 본바닥이자 형님의 나라라 할 중국의 이중톈 교수는 역시 고수다운 마음 씀씀이를 보였다.
그는 포럼 끝자락 질의응답 시간에 “중국인인 저보다 최우석 선생과 이문열 선생이 『삼국지』에 대한 내공이 더 깊은 것 같다”고 말했다.
30여 분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중톈 교수가 『삼국지』를 빌려 일관되게 주장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는 스스로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휴머니스트이자 인본주의자이며 인도주의자였다.
20세기 고난의 중국사를 제 몸으로 겪고 난(그는 문화대혁명 당시인 1965년에 신장 자치구로 하방돼 막노동을 했다) 뒤 인화(人禍)가 그르치고 있는 인류사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 듯했다. 『삼국지』는 말하자면 그러한 자신의 성찰과 그로부터 끌어올린 교훈을 말하기 위해 빌린 도구처럼 보였다.

“사람이 만든 재앙이 곧 전쟁이다. 한국·인도 전쟁으로부터 걸어 나온 최근세사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중국 삼국시대도 전쟁의 시기였다. 우리가 이 시대를 두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고난이요, 아프게 각성하며 이끌어내야 할 것은 인도주의다. 이 시대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고위 관료와 무력을 지닌 장군 등이 모두 지방에서 제 세력을 키워 할거에 들어가기 바빴다.

중앙권력과 대항하면서 지휘를 전혀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각종 살벌한 전쟁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수습해야 하는 천하대란의 상황에 이르자 백성들은 제대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백골이 천리에 널려 있고, 도처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중톈 교수는 이 대목에서 최근 중국 쓰촨성 지진의 참사가 떠오르는지 잠시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 사태와 광우병 논란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했다.

“『삼국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준다. 첫째, 어떻게 인류의 재난인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지혜다. 어떤 이는 서로 경쟁하고 생존하며 발전을 노리는 과정에 등장하는 엄청난 모략을 배울 수도 있겠다. 『삼국지』의 시대는 ‘반드시 상대방을 잡아먹어야 한다’ ‘나 홀로 모든 것을 독차지해야겠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던 시기다. 우리는『삼국지』의 이 독선과 아집을 벗어 던져야 한다.

중국 역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그동안 이런 독재자의 잔인성에 희생당한 민초가 얼마나 많은가. 이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서로 목숨을 걸고 다투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모든 것을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사고도 버려야 한다. 서로 협력해 함께 행복하고 제각기 삶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화와 협력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오늘 『삼국지』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의 말투는 단호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청중이 뜨거운 박수로 동의를 표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강연이 끝난 뒤 『삼국지』 포럼에 참석했던 몇몇 이중톈 교수의 팬이 그와 담소를 나눴다. 오가는 눈길은 따듯했고 나눈 이야기는 훈훈했다.
이문열씨의 『삼국지』를 출간한 박맹호 민음사 회장은 “오늘 분위기를 보니 중국 본토에 이문열 판 『삼국지』를 역수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덕담했다. 이중톈 교수는 “이문열 선생이 곧 완간하신다는 『초한지』를 번역해 중국에서 출판하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덕담했다.

『삼국지』의 배경이 전쟁과 환난기라 여성에 대한 언급이 너무 없다는 얘기가 나오자 『삼국지 여인사』를 한번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즉석 제안이 나왔지만 두 작가 모두 웃기만 했다. 『삼국지 경영학』의 저자로 전문가 뺨치는 『삼국지』 전문가인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은 “조조와 제갈량의 부인 모두 현명한 내조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이 너무 미미하다”고 덧붙였다.

이중톈 교수는 “중국 고전을 굳이 비교해 비유하자면 『홍루몽』은 바다와 같고 『삼국지』는 강과 같다면, 『수호지』는 호수요 『서유기』는 구름”이라고 풀었다. 그는 또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물음에 거침없이 “조조”라고 답하면서 “요즘 중국에서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다”며 “그는 솔직하고 꾸밈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최 전 부회장이 “베팅을 한다면 조조이지만 월급쟁이로서는 좀 위험할 것 같다”고 농담하자 “그래도 보스를 택할 때는 역시 조조”라고 말해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중톈 교수는 탁자 위에 놓인 포도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의 주량은 소주 반 잔. 입술만 적시는 정도다.
취미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전부다. 중국에서는 저서의 인세 수입만으로 중국 47위 갑부가 됐을 만큼 인기 저술가이고 ‘포브스’ 중문판이 뽑은 ‘2008 명인방’ 42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지난해 인터넷 투표에서 ‘중국 여성이 꼽는 신랑감 후보 1위’의 영예를 안았다. 부인이 질투하지 않느냐는 장난기 어린 질문에 “마누라가 내 운전기사”라고 돌려 말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목격한 애독자가 사진을 찍은 뒤 바로 인터넷에 올리자 그를 보려고 몰려든 손님으로 식당이 만원이 됐다는 일화까지 있다. 지금 몰두하고 있는 주제는 ‘백가쟁명’으로 곧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서울에 와서 먹은 음식 중에서 ‘짜장볶음밥’이 신기했다”고 털어놓은 이중톈 교수는 짜장과 볶음밥을 한 접시에 올린 한국인의 아이디어가 놀라웠다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15일 오후 서울 인사동을 둘러보고 16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유교와 선비사상’을 주제로 강의한 뒤 17일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열린 강연회를 마무리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마음속 『삼국지』의 추억이 한국과 중국 사람을 이어주기에 첫 한국 방문이 즐거웠다”고 인사한 그는 “자주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이중톈(易中天)은 1947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81년 우한(武漢)대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이 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했다. 현재 샤먼(廈門)대 인문대학원 박사 지도교수로 일하며 주로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문학·예술·미학·심리학·인류학·역사학 등 학제 간 벽을 허무는 다양한 연구를 거친 글쓰기와 대중 강연에 힘쓰며 인본주의자로서 21세기 세계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2005년 4월 중국중앙방송(CC-TV)에서 방영된 인문학 강좌 ‘백가강단(百家講壇)’에 등장해 『초한지』와『삼국지』를 새롭게 해석한 ‘고전 대중화’ 강의를 펼치면서 중국 전역에 고전 열풍을 몰고 왔다. 국내에 번역·소개된 저서『품인록』『제국의 슬픔』『중국 남녀 엿보기』『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이중톈, 제국을 말하다』등으로 한국에도 애독자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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