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정책 흔들려 ‘차이나플레이션’ 우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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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34면

대지진으로 쓰촨 지역 식료품이 부족한 가운데 17일 한 자원봉사자가 이재민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경제적 손실 200억 달러(약 21조원).

중국 대지진의 경제 파장

미국 재난 평가회사인 에어 월드와이드가 16일 내놓은 중국 쓰촨성 대지진의 경제적 피해 규모다. 아직 수습 초기 단계여서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경제적 피해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는 된다.

이번 쓰촨 대재진의 피해 규모는 2005년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보다는 크지 않다. 당시 미국이 본 피해는 700억 달러 선이었다. 이보다 앞선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피해 규모는 1400억 달러였다.

쓰촨 대지진의 인명 피해가 카트리나 사태나 고베 대지진보다 훨씬 많은데도 물질적 피해가 적은 것은 산업시설 집중도의 차이 탓으로 풀이되고 있다. 에어 월드와이드는 “쓰촨 지역에 공장 등 고정자본(산업시설)이 적어 경제적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집계한 지난해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3조2500억 달러다. 피해 규모 200억 달러는 중국 GDP의 1%도 되지 않는다. 넘치는 경제 활력, 가파른 성장세 등 중국 경제의 최근 흐름에 비춰 그 정도 피해가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대형 자연재해는 당장 눈에 띄지 않지만 이후 경제 흐름을 갈라 놓는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쓰촨 대지진이 남길 흔적으로 인플레이션 악화를 첫손에 꼽고 있다. 중국 정부가 76년 탕산 대지진 이후 32년 만에 발생한 대지진의 상흔을 씻어내는 과정에서 2007년 초 이후 바짝 당기고 있는 긴축정책 고삐가 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잠재된 불안의 표면화

찰스 굿하트 영국 런던 정경대학 교수는 “대형 자연재해나 금융위기 등은 잠재된 불안 요인이 표면화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에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가 바뀌거나 불안 요인이 정부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굿하트 교수는 일본 고베 대지진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90년 거품 붕괴 이후 하강하던 일본 경제는 95년 고베 대지진을 계기로 디플레이션 국면에 빠져 버렸다. 고베 지역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마침 다이와은행의 불법 행위가 들통 나 일본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됐다. 은행들은 더 높은 금리를 주고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자 아예 대출을 꽉 조여버렸다. 버블 후유증으로 발생한 신용 경색이 더 악화됐다. 정부의 부양 정책 효과는 급감했다. 결국 그해 일본 물가상승률은 50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0.1%)를 기록했다. 이후 일본 경제는 2005년까지 10년간 장기 디플레이션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미국의 경제 분석기관인 RGE모니터의 중국 담당 레이철 지엠바는 16일 낸 보고서에서 “쓰촨 대지진으로 중국 경제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불안 요인 가운데 특히 인플레이션이 고개를 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긴축 균열

중국 중앙은행이 12일 시중은행 지급준비율을 16.0%에서 16.5%로 0.5%포인트 올렸다. 올 들어서만 네 번째 인상이다.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서였다. 중국 소비자물가 지수는 지난 4월 8.5% 상승했다. 2월 이후 석 달째 8% 가 넘는 상승세를 이어갔다.

과연 인민은행이 이런 긴축 정책을 계속 고수할 수 있을까.

쓰촨 대지진의 복구를 위해 인민은행이 긴축 정책을 강도 높게 밀어붙이기는 힘들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피해 지역에 정부 자금 방출 외에도 특별 대출 형식으로 긴급 자금이 투입될 예정이다.

마이클 페티스(경제학) 베이징대 교수는 “인민은행이 한편에서는 긴축 고삐를 죄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 지역에 돈을 푸는 행태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돼 쓰촨에 풀린 돈이 결코 그 지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며 “이미 급증한 대출과 맞물려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 중국 시중은행이 올 1~4월 꿔준 돈은 지난해 대출액(3조6000억 위안)의 절반(1조8000억 위안) 수준이다. ‘대출 규모를 지난해 수준에서 동결한다’는 인민은행의 올해 유동성 관리 원칙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중국 증권시장은 이미 앞서 움직이고 있다. 긴축 완화 기대감이 퍼지면서 지진 대참화에도 상하이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한 주 동안 2.5% 상승했다.

불안한 징조

쓰촨 대지진은 가뜩이나 불안한 물가를 자극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식료품 가격이 오를 수 있다고 예측한다. 쓰촨은 중국 내 최대 쌀 경작 지역이고 돼지가 가장 많이 사육되는 곳이다. 지진으로 농장과 축사가 대거 파괴된 가운데 도로 파손으로 농산물 수송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에 따른 공급 차질은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중국은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05년 쓰촨성에서 돼지 돌림병이 돌자 중국 전역이 돼지 파동을 겪었다.

상하이 산업은행 이코노미스트인 루젱웨이는 “대지진 이후 (중국) 정부가 비축 물량을 풀고 가격을 통제해도 식료품 값이 뛰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는 별도로 중국의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올 1분기 평균 임금 상승률(연율 환산)은 18.5%였다. 지난해 3, 4분기에 각각 11.2%와 10.7% 올랐다.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요인 중 가장 통제하기 힘든 임금 상승 추세가 심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중국 인민은행의 올해 물가상승 억제 목표(4.8%)는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결국 물질적인 피해라는 강진에 이어 중국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흔들리는 여진이
뒤따를 공산이 큰 상황이다. 이 경우 단기적으론 중국 경제가 과열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물가 급등을 걱정하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단기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도 한다.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필요한 물건을 사두는 등 씀씀이를 늘리는 경향 때문이다. 대지진이 아니라도 이미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지난 4월 중국 소매 판매가 지난해 평균(15% 선)보다 훨씬 높은 22% 수준에 이르렀다. 소득 증가와 중국 정부의 내수 촉진 정책 탓일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에 따른 소비 증가로 풀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끝은 늘 경기 경착륙이었다는 게 전문가의 경고다.

인플레이션 수출

쓰촨 대지진의 파장은 중국 내에만 머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전체 식료품 가운데 한국 24%, 일본 15%, 미국 7% 등이 중국산이다. 쓰촨 대지진의 파장으로 중국 농산물 값이 들썩이면 곧바로 한국 등으로 확산되기 충분한 조건인 셈이다. 더욱이 본격적으로 복구 작업이 시작되면 폐허가 된 쓰촨 지역을 되살리는 데 필
요한 원자재도 품귀 현상을 빚을 수 있다.

노리엘 루비니(경제학) 뉴욕대 교수는 “쓰촨 대지진이 원유와 원자재 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아직은 없지만, 복구 작업이 시작되면 국제 원자재 가격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의 임금 상승 등으로 중국 수출품 가격이 상당히 오른 상황에다 대지진까지 겹쳐 ‘차이나플레이션(Chinaflation: 중국발 세계 인플레)’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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