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 재무장 일본 우경화] 上. 더이상 망언 사죄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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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도 반일 플래카드
24일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말레이시아 내 100여 개 화교 단체는 이날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기도를 규탄하는 집회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었다. [쿠알라룸푸르 AP=연합]

#1. 1994년 5월 7일, 옛 일본군 출신인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법무상이 취임 열흘 만에 물러난다. 나흘 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는 공창(公娼)이었다"고 말한 것을 사과하고 사퇴한 것이다. 그의 발언은 언론이 대서 특필했고 하타 쓰토무(羽田孜)총리가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2. 2005년 3월 27일, 일본의 차기 총리감 1순위로 촉망받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자민당 간사장 대리가 강연회에서 "종군위안부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했다(본지 4월 2일자 2면)."일본 언론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 퍼졌다"는 것이다. 이 발언을 문제삼는 일본 언론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일본 고위 관리들의 망언 역사는 뿌리깊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궤변은 일제 패망 60년이 되도록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망언에 대한 정부 대응과 당사자의 자세다. 예전에는 망언이 문제가 되면 사과하고 발언을 취소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본지 확인 결과 80, 90년대엔 과거사 관련 망언으로 각료직을 내놓은 사례가 다섯 차례 있었다. 사과를 거부하다 파면당하기도 했다.

86년 10월 월간지 인터뷰에서 "한일합방은 합의에 의한 것이며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문부상이 그 예다. 파면을 단행한 총리는 그 자신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였다.

요즘은 다르다. 각료가 망언을 해도 총리가 "발언 일부만을 보도한 게 아니냐"며 두둔하기도 한다. 당사자도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며 큰소리다. "교과서에 강제 연행과 종군위안부 표현이 줄어들어 다행"이라고 말했던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문부상이 그렇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도 과거와 뚜렷이 대조된다. 나카소네는 85년 처음으로 총리 자격을 내걸고 참배해 한국.중국의 반발에 부닥쳤다. 그는 이듬해 "오해와 불신의 우려가 있다"(관방장관 담화)며 공식 참배 중단을 선언했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 역시 한 차례 참배에 그쳤다. 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며 취임 이후 매년 한 차례씩 참배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이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중시해 온 전통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사히신문은 22일자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아시아 경시 외교로 사면초가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은 교과서 문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재 역사 교과서 검정기준에는 "이웃 국가들의 입장을 배려한다"는 규정이 있다. 82년 1차 교과서 파동 때 만들어진'근린제국 조항'이다. 당시 아시아'침략'을 '진출'로 묘사한 부분 등이 문제가 되자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관방장관이 담화를 내고 "정부 책임하에 교과서를 수정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요즘 정부는 "사관(史觀)의 문제에 정부가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문부성 수뇌부는 근린제국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한 대응책이 크게 달라졌다. "인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우익 국가주의 사관이 정치 지도자들의 뇌리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 왜?
정치 사회당 몰락 … 자민당 견제 못해
경제 불황 불만이 왜곡된 애국심으로
국제 미국 지원 업고 자위대 역할 확대

일본의 우경화 추세가 뚜렷해진 것은 1990년대 이후다. 국제사회에서 경제대국에 걸맞은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극우 민족주의 ▶일본 역사를 다시 보자는 우익 사관 ▶전범국가의 원죄에서 벗어나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보통국가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 논의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민족적 자긍심 제고, 국제적으로는 정치.군사적 영향력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주의'로 요약하기도 한다.

우경화엔 다양한 원인이 작용했다. 정치적으로는 자민당-사회당의 보혁(保革)구도 해체를 들 수 있다. 사회당 의석이 급격히 줄어들어 자민당을 견제할 힘을 상실한 것이다. 현재 제1 야당인 민주당은 성향 면에선 자민당과 큰 차이가 없는 보수파다.

사회.경제적 요인도 있다. 릿쿄대 이종원 교수는 "90년대 이후 장기불황에 따른 일본 사회의 자신감 상실이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애국심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분출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세대교체도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참함을 체험한 세대와 달리 전후에 태어난 세대는 보통국가론에 매력을 느낀다.

국제질서의 변화는 우경화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중국 견제 등의 목적으로 미국이 일본을 동북아 지역 안보 파트너로 삼는 정책을 추진해 온 것은 일본의 안보강화 전략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 덕에 일본은 90년대 후반부터 자위대의 작전 범위를 확대시키는 법안들을 무리없이 통과시켰다.

북한 변수도 작용했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교수는 "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납치문제 등이 일본인의 안보 의식을 부추겼다"고 말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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