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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갇힌 아이들] 3. "세상에 나 혼자뿐" 우울증 걸린 12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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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열일곱살 정미는 지난해 당뇨병 진단을 받고 나서 거의 매일 잠들 때까지 흐느껴 울었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그에겐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지금은 하루에 두번 혼자 인슐린 주사를 놓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일상은 여전히 두렵고 서럽다.

#1 외로운 삶 → 우울증 걸려 → 치료 방치

친구들은 웃고 있는 미정(12.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처럼 웃음을 잃은 미정이는 소아 우울증 환자다. 수업시간엔 언제나 탄력 잃은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듯 공허한 시선으로 칠판을 응시하고 있다. 굼뜨고 활력 없는 거동에 말수조차 없다 보니 으레 또래들의 놀림감이 돼 버렸다. 암팡지고 변덕스러운 친구들이 장난삼아 쥐어박거나 꼬집어도 덤덤한 얼굴로 우두커니 맞고만 있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 표현에 서툴고 구차스럽기 때문이다.

감수성 많은 미정이에게 우울증이 생긴 것은 4~5년 전. "부자가 아니라서 너무 싫어요. 공책도 아껴 써야 하고, 반찬도 김치하고 계란밖에 없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서울시 월곡동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생활해 온 미정이에게 가난은 한 아이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수렁이었다. 보일러공인 아빠는 한달에 고작 한두번 얼굴만 비칠 뿐 그대로 방치한 상태이기 때문에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일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백화점 음식 코너에서 일하는 엄마는 수천만원대의 카드빚까지 지고 있다.

미정이는 "어두컴컴한 단칸방에 혼자 있으면 세상에 나 혼자뿐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끔 까닭 없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그리고 이유 없이 찾아온 울화증을 냉큼 거두기 어렵다. 그렇게 미정이의 마음은 시나브로 병들어 갔다.

그나마 얼마 전부터 다니고 있는 공부방이 미정이에겐 유일한 즐거움이다. 공부방 선생님이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카드빚을 다 갚았으면 좋겠다"며 펑펑 울어버렸다. 밤골아이네공부방의 이숙경 수녀는 "미정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되지만 가난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성북정신건강센터에서 서울 지역 9개 공부방의 296명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한 결과 무려 36명(12.2%)이 전문적인 심리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2 가정 해체 → 치료시기 놓쳐 → 중병으로

"나, 달리기 잘하는데…."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광현(7)은 너무나 당연한 듯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얼핏 보기에도 광현이는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도 모래톱 위에 꽂아둔 작대기처럼 금방 쓰러질 것 같다. 달리기할 때는 몇십m도 채 못 가서 고꾸라지고 만다. 그래도 어떤 증오심이나 열등한 육체에 묶여 있을 수치심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 원래부터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스무살이 되기 전 시집와 광현이를 낳았다. 일용직으로 생계를 꾸리던 아버지와 걸핏하면 다투었던 엄마는 광현이가 두살 되던 해 집을 나갔다. 알코올 중독이던 아버지가 아이를 어엿하게 양육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광현이가 네살 때 보육원에 맡겨 버렸다.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아이의 다리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최근 광현이가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보육원은 "임신 중 어머니의 흡연 또는 약물 복용으로 아이 다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진단 결과를 아버지에게 알렸다. 광현이는 "아빠가 돈만 벌면 다리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아이의 꿈은 이뤄질까.

서울 중랑구의 단칸 셋방에 사는 기원(13) 4남매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난해부터 4남매 모두 앓아 온 충치의 고통 때문이었다. 돈이 없어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했다. 어쩌다 돈이 생겨도 치과에 갈 엄두는 낼 수 없었다.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아 거금의 치료비를 한푼도 에누리 없이 내야 할 형편에 치과 찾는 일이란 사치였다.

6년 전만 해도 아빠는 대기업의 어엿한 부장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실직하면서 가계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궁여지책으로 학교 앞에 분식점을 차렸지만 그마저 실패로 끝나 수렁에 빠진 가계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2000년 집을 나갔다. 그런 처지에 아빠가 자녀들의 충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관할 서울 면목사회복지관의 주선으로 4남매는 가까스로 치료를 받았다. 기원이는 간단히 처치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 신경치료까지 해야 했다. 면목사회복지관 송상훈 사회복지사는 "일반 질환은 건강보험증이 없는 아이들도 일반 병원과 연계해 치료를 받지만 막대한 비용이 드는 치과는 사각지대"라고 말했다.

#3 현실에 안 맞는 식권 지원 → 아이들 외면

초등학교 3학년인 상진(9)은 지난해까지 월말이면 동사무소에서 노란색 '사랑의 식권' 30장씩을 받아 갔다. 2000원 한도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이 식권은 구청에서 결식아동에게 저녁을 사 먹으라고 나눠주는 것이다. 엄마는 2년 전에 가출했고 일용직 노동자인 아빠는 툭하면 며칠씩 집을 비운다. 상진이는 으레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은 학교의 무료 급식을 이용하며, 저녁은 이 식권으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식권을 쓸 수 있는 곳은 두세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2000원 가지고는 자장면 한그릇 먹기도 힘에 겹다. 식당 주인도 상진이가 식권을 낼 때면 대놓고 홀대해 왔다. 상진이는 그래서 차라리 굶는 쪽을 택했다. "식권 낼 때마다 거지가 된 기분"이 드는 게 너무 싫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올 초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A공부방을 알게 됐고, 요즘은 저녁을 공부방에서 해결한다. 공부방에선 결식아동들이 식권 한달치를 가져다 주면 이를 동사무소에 갖다 주고 그 액수만큼 현금으로 받아와 급식비에 보탠다. 아이들의 식권을 빼앗아 가는 몰염치한 어른들도 있다. 상진이의 공부방 친구인 경수 아버지는 아들의 식권으로 술 안주거리를 산다고 한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A공부방은 지난해부터 구청에 "차라리 공부방에 직접 식비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다음달부터는 공부방이 식비를 직접 받게 된다.

특별취재팀

◇알림=18세 이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우려가 있어 가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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