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VS 영화] 한물 간 세대의 밉지 않은 능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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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별처럼 많은 배우 중에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난 잭 레먼이라 말할 것이다. 짧은 미국생활 중 할리우드 클래식 코미디들에 푹 빠져있던 나를 사로잡은 이 배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휘말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는 코미디 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웃는 눈 속에 쓸쓸함을 실어 보내는 그의 연기에 빠져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먼트'등 그의 출연작을 섭렵했다. 하지만 1960년대 전성기를 보낸 그의 93년작 '그럼피 올드맨'을 집어들었을 땐 '와, 이 나이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66년 '포춘 쿠키'이후로 '이상한 커플''버디 버디'로 이어지는 월터 매토와 마지막 콤비를 이룬 코미디다. 레먼이 73세, 매토가 78세.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둘은 여전한 앙숙 연기로 그해의 깜짝 히트작을 만들어 냈고 영화사는 매토가 여든이던 2년 후 속편까지 만들어 냈다.

할리우드가 부러운 건 이런 점이다. '황금연못'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처럼 주류에서 종종 노년을 위한 노년의 영화들이 나온다. 그들은 당당히 젊은 배우들과 수상 경쟁을 벌이고 '아메리칸 뷰티'로 주연상을 받은 케빈 스페이시가 "영화 인생에 끝없는 영감을 준 잭 레먼에게 영광을 돌린다"며 존경을 보내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우리도 노년배우들이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솔직히 스크린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배우로서의 영예는 과거의 일뿐인 그들에게 젊은 배우들이 의무감 같은 존경심 말고 무엇을 가질까 .

그래서 '고독이 몸부림칠 때'라는 영화는 무척 반가웠다. 이들이 히트작도 만들어 내고 상도 타고 해서, 젊은 배우들과 경쟁자로서 혹은 존경받는 선배로 늙어가겠구나 싶었다. 나는 주현이라는 배우를 70년대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기억한다. 트렌치 코트를 입고 나와 이루지 못한 사랑에 쓸쓸해 하는 그의 연기에 가슴 설렜던 내겐 그는 아무리 코믹연기를 해도 여전히 멜로 배우다.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의 주인공이었던 송재호 역시 고독하면서도 심지곧은 표정의 분위기 있는 배우다. 80년대 사격에 심취한 그가 장총을 들고 찍은 사진은 아주 근사했다. 근엄한 아버지의 표상 김무생과 왕년의 스타 선우용녀야 어린시절 TV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인물들이고…. 그러니 영화를 보러갈 땐 그들의 연기를 보며 자란 내가 나이 들어 확인할 어떤 향수 같은 기대가 있었다.

남해 바닷가에서 삶의 무료함에 지쳐 티격태격 싸우는 김무생과 주현, 홀로 외손녀를 키우는 송재호와 양택조가 살아가는데 서울에서 아리따운 선우용녀가 등장한다. 흠, 여자를 둘러싼 네 명의 쟁탈전이 펼쳐지며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겠군.

'그럼피 올드맨'도 그렇지. 꽁꽁 얼어붙은 미네소타 시골마을에서 50년 넘게 으르렁거리며 이웃에 살고 있는 두 할아버지. 이 동네에 중년 여성이 이사 오면서 둘의 싸움이 시작되지. 우위에 있어 보였던 잭 레먼이 돈 문제 때문에 월터 매토에게 여자를 넘기면서 싸움이 정리되는 듯하다 마지막에 진정한 우정을 회복하면서 사랑도 되찾는다는 식으로 막을 내리지.

'고독…' 도 시작 부분에서 서로의 관계가 소개되고, 중간에서는 네 사람의 엎치락뒤치락 사랑 싸움이 펼쳐지며 절정에 이르다 결말부분에서는 서로의 우정을 재발견하고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는 손쉬운 예상을 벗어났다. 우선 영화는 시작.중간.결말로 가는 전형적 상업 영화구도를 탈피하고 싶은 듯했다. 이야기는 선우용녀를 노리는 할아버지들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등장으로 자극받은 양택조의 욕망, 건망증과 스쿠터 면허증을 따기 위한 노력, 오십이 다 된 박영규가 장가를 갈 수 없었던 슬픈 비밀, 겉으로는 공기총을 휘둘러대는 반공주의자 김무생이 속으로는 성도착증 환자였으며, 동생을 좋아하는 진희경을 진짜 좋아했던 사람은 형 주현이었다는 등 이야기는 등장인물 저마다의 삶을 더듬어 가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영화는 사람들이 살아온 세월만큼 쌓아온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삶에의 의지 곧 사랑.결혼, 혹은 면허증 같은 것에 집착하다가도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 노년의 쓸쓸함. 황혼 이혼의 위자료로 쓸모없는 바위섬을 받은 선우용녀가 "세상에 좋은 사람은 많은데 좋은 남자는 있을까"라고 말할 때의 처연함, 무슨 말을 해도 결론은 "그러니까 장가를 가란 말이다"로 끝나는 주현의 비논리, 내심 사랑하는 송재호에게 "코가 참 착하게 생겼네요"라고 말하는 조심스러움과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당신이 뭐라고 했는데?""내가 뭐라고 했더라?"라는 엉뚱함 같은, 확실히 오래 살아본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감정.

하지만 영화의 기획이 노년의 배우들을 앞세운 과감함으로 승부했다면, 스토리는 좀 안전하게 상업적인 방법으로 갔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그럼피 올드맨'은 단순한 스토리로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훨씬 몰두시키는데 '고독이…'는 "그래서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될건가"에 신경쓰느라 생각보다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저쪽에 앉았던 중년 여성관객들이 "좀 심심하네"하며 극장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 영화가 노리는 새로운 관객층인 중년 역시 이미 자극적인 웃음과 전형적인 스토리를 따라가는 영화들에 익숙해 있다. 그들에게는 일단 익숙한 방법으로 새로움을 던져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늙은 영화들이 계속 나와줄 것을 고대한다. 나이 들어 가면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싶고, 무엇보다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가 지금보다는 백 배는 어려웠을 수십년 전, 남의 손가락질을 피해 가지 않고 살아왔던 옛날 배우들이 연륜을 꽃피우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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