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책’ ⑫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해인사를 거닐다>, <나를 찾는 암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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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에서 마음을 열다 혹은 마음이 피다

첫 만남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였다. 유홍준이 꼽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5곳 중 하나가 개심사였다.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물고 한가로이 낮잠 자는 듯한 절’이라고 설명한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던 듯 싶다. 만사 작파하고 고작 눈꺼풀만 떨어대는 황구의 순정한 게으름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개심사로 처음 마음의 방향을 튼 건 2001년 5월 어느 문학잡지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은 후였다.

“구름 가까이에 선 골짜기 돌아
스님 한 분 안보이는 절간 마당,
작은 불상 하나 마음 문 열어 놓고
춥거든 내 몸 안에까지 들어오라네.

세상에서 제일 크고 넓은 색깔이
양지와 음지로 나뉘어 절을 보듬고
무거운 지붕 짊어진 허리 휜 기둥들,
비틀리고 찢어진 늙은 나무 기둥들이
몸을 언제나 단단하게 지니라고 하네.

절 주위의 나무뿌리들은 땅을 헤집고 나와
여기저기 산길에 드러누워 큰 숨을 쉬고
어린 대나무들 파랗게 언 맨손으로
널려진 자비 하나라도 배워보라 손짓하네”

시인 마종기의 ‘개심사’라는 시다. 정작 시의 내용을 마음에 품은 건 아니었다. 단지 기댈 곳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기형도 식으로 말하면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마음이 어수선했다. 사회생활 10년 차를 넘기기 시작하자 주변을 둘러싼 건 부비트랩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챙겨뒀던 멘토는 멀리 떠난 상태였고,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질 시간은커녕 품을 시간도 없었다. 희박한 공기 속에 갇혔다는 느낌이 앞서자 ‘바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어디 나만의 문제일까?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떠나고 싶다는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꽤나 되었습니다. 매사에 기쁨보다는 짜증이 앞섰습니다. 가지런하기보다는 번거로웠습니다. 평안하기보다는 부딪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공연히 건방 떨거나, 비굴해지는 모습들이 자주 마음에 걸렸습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치도 않은데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생각과 생각이 부딪치고, 주장과 주장이 으르렁댔습니다. 그래서 가깝지 않은 먼 곳으로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경원하면서도 기대하는 그곳의 번다함에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해인사를 거닐다>(강우방 외 지음, 옹기장이), 곽병찬의 글 중에서.

충남 서산시 운산면, ‘코끼리의 왕’이 산다는 상왕산이라는 지명과 ‘세심동 개심사’라는 돌 팻말이 절집 초입에 있다는 정보만 달랑 챙기고 길을 나섰다. 허술한 정보 탓에 초행길은 말 그대로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절집에 갈 때는 차를 버려두고 가라는 어느 선배의 말을 실행에 옮기느라 몇 차례나 차를 갈아타는 수고를 견뎌야 했던 건 그나마도 양반님 행차 수준이었다.
‘고즈넉함’ 만으로는 당할 상대가 없을 것 같은 해미읍성에 잠시 마음을 맡겼던 것도 급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반전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결 좋은 미소를 띤 어느 촌로가 “개심사 가려거든 타라”고 경운기를 권했고, 어리바리한 초행자의 선택은 뻔했다. 냉큼 응하고 말았다! 허나, 정작 경운기의 최종 목적지는 개심사가 아니었다. 서해안 고속도로 교각 밑을 지나 신창저수지 길로 접어드는 순간 촌로가 하차를 명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는 게 개심사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부연설명과 함께….
막막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절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구불구불한 지형에다 저수지 물빛은 보기 드물게 시퍼랬다. 가물에 콩 나듯 차들이 오가긴 했지만 그마저도 빚쟁이에게 쫓기듯 빠른 속도여서 말을 걸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인적이 없으니 인기척도 없었다. 대신 거대한 목장 능선으로 소똥처럼 다닥다닥 붙은 소들의 이동이 어질 머리를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도 어정쩡한 상황. 퇴로는 사라진 듯 했다.

“그저 경건하고 간절해지고 싶었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자리를 조용히 진정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흔들림이야 저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어찌 한 손을 돌을 던지며 다른 손으로 수면을 잔잔케 할 수 있을까요.”

<해인사를 거닐다>, 곽병찬의 글 중에서.

‘흔들림이야 내게서 비롯된 것인데’라는 말을 되뇌며 몇 번의 길을 꺾어 돌자 평정심이 찾아 들었다. 하지만 얄팍한 평정심이었다. 의심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이 길이 과연 절집으로 이르는 길이 맞는가, 라는 한심한 생각까지 끼어들었다.

“어떤 길목을 돌아서면 뒤에 나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있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다만 이끼 낀 바위가 있거나 비범한 기운을 떨치며 솟아오른 나무가 있다. 그 바위와 그 나무가 나를 부른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 바위와 나무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하고 있던 내가 그것들을 지나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리라. 그 바위와 나무에 내가 걸어 두었던 내 마음이 나를 부른 것이리라.”

<해인사를 거닐다>, 황현산의 글 중에서.

꽤나 걸었을 것이다. 시계와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뒀던 터라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개심사가 코앞에 있구나 라고 생각한 건 오아시스처럼 등장한 몇몇 구멍가게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심동’ ‘개심사’라는 두 개의 돌 팻말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과 등허리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간 게 그 때였을 거다.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게 기껏 이거였나 싶게 별다른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설프게도 절집에서 내려오는 한 무리에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을 목격한 감흥이 더 컸다.
자연스러운 감흥에 몸을 얹은 건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내처 오르기 시작한 개심사 산 길에서였다. 길고 긴 도입부가 무색하리만치 산길은 짧았다. 5분, 아니면 10분쯤 올랐을까.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계단 사이로 봄볕이 스미는 것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개심사 연못과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교도 스케일로 경중을 따지는 요즘 세상에 빗대면 개심사의 스케일은 한심했다. 안양루, 대웅전, 심검당, 영상회개불정 등 몇 채의 건물이 전부였고, 대웅전 앞마당은 외갓집 앞마당보다 작아 보였다. 대웅전 옆 건물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얼마쯤 지나자 절집에 사는 보살이 떡 한 접시를 내 주었다. 긴 산행에 봄볕은 내리쬐고 허기까지 채우자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절집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깜박 졸았을까 싶은데 할머니 보살 얘기로는 그렇게 2시간 여가 흘러갔다고 했다. 늦은 오후의 서늘한 기운이 머리를 치켜들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작은 절 마당이 한없이 친근했다. 시인 문태준이 쓴,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의 그 마당이었다. 수수한 건축미의 극치! 遮 대웅전 처마 밑에 달린, 해강 김규진이 썼다는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는 예서체 현판은 마음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하이라이트는 심검당이었다. 대웅전 보다 더 오래된 이 건물의 기둥과 서까래는 눈에 띄게 휘어있거나 굵기가 달랐다. 그러고 보니 범종각도, 대웅전 옆 요사체도 모두 그랬다. 자연이 일상을 떠받친 형국. 그러니까 어차피 일상 역시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걸 은근하게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두 다섯 시간 여를 절집에 머물렀다. 그중 대부분은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친 채였다. 초행자의 그런 모습이 궁금했을 법도 한데, 절집의 어느 누구도 말 한 마디 붙이지 않았다. 아마도 사나워 보이는 인상 탓이었을 것이다. 어제까지도 삶의 한 복판에서 으르렁대던 얼굴이 쉬이 펴졌을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개심사 초행 이후 마음이 살짝 펴졌던 것 분명해 보였다. 매해 ‘그저 경건하고 간절해지고 싶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자리를 조용히 진정시키고 싶고, 그걸 혼자서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러니까 ‘흔들림이야 내게서 비롯된 것인데 어찌 한 손을 돌을 던지며 다른 손으로 수면을 잔잔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면 버릇처럼 개심사를 찾게 되는 걸 보면….
“산사의 기호는 침묵의 덩어리 같은 적막이다. 그 적막은 자기 자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자연과 가까이하게 하는 접속부사이다. 사람이 입을 닫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금언을 잊지 말 일이다.” <나를 찾는 암자여행>(마음향기), 정찬주의 글 중에서.

글_문미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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