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일씨는 한국전쟁 전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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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국 교민 축구대회에서 만난 전병일<左>씨와 앙드레 벨라발이 건배하고 있다.

“전병일씨 반갑습니다. 나는 3중대였습니다.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앙드레 벨라발·80)

“나도 3중대였습니다”(전병일·79)

지난주 파리 근교 슈아지 르 루아에서 교민 종교단체와 입양아 모임, 한국인 프랑스 외인부대원 등 12개 팀이 참가했던 교민 축구대회에선 매우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한국인 프랑스 외인부대 명예회장 벨라발씨와 프랑스 외인부대 한국인 1호 전병일씨가 주인공이었다. 한국전쟁 후 고국을 떠난 전씨가 팔순을 앞두고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한국적이 없어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본지를 통해 전해지자, 벨라발씨가 “꼭 옛 전우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외인부대에 전달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이날 행사에 초대받았다.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서로 두손을 꼭 잡았다. 50여년만의 해후였다. 두 사람은 한국전 당시를 회상하며 한참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휴전 후 전씨에게 외인부대 입대를 권유했던 오방 등 같은 부대원들의 이름을 대며 즐거워했다. 벨라발씨는 이 날 사진을 여러장 들고 나왔다.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 프랑스대대 소속 전병일<左>씨. [사진=앙드레 벨라발 제공]

특히 한국전 당시 PX막사에서 찍은 전씨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씨가 PX에서 담배를 피우며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전씨는 “그 때 PX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빛바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벨라발씨는 기자에게 “전씨가 국적이 없어 고향에 가지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에서 참전 용사는 큰 존경을 받는다”며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군인이 왜 국적도 없이 지내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벨라발씨가 전씨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옛 전우이기도 하지만, 처음 만난 기자에게 대뜸 “나는 절반은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1952년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외인부대 출신인 그는 제대 후 인도차이나 내전에 지원했다가,그 곳에서 한국에 파견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3년간 한국에 더 머물렀다. 휴전 후 유엔 참전국은 일부 병력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포함된 것이다. 그는 서울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전쟁고아를 도왔다고 한다. 이 때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으면서 고아를 돌보고 있던 갓 스무살된 한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여성과 함께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어 아내가 적응하는데 몹시 힘들어했다”며 “아내를 위해 한국음식식자재를 구하러 다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후에도 한국을 10번이나 다녀갔다. 그는 “전쟁 직후 서울은 가난과 고통밖에 없었는데 눈부시게 성장한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그의 부인은 6년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요즘도 일주일에 서너번은 파리의 한국 음식점을 찾고 식탁에는 늘 김치가 오른다고 했다.

전씨에게는 이날은 매우 뜻깊은 날이었다. 모처럼 한국인 사회에 발을 내디딘 전씨는 “20년전쯤 대사관 행사에 가 본 이후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을 보기는 처음”이라며 “벌써 한국에 돌아간 것 같다”고 기뻐했다. 그는 “이가 좀 튼튼하면 게장과 김치를 맘껏 먹을텐데”라면서도 후배 외인부대원들이 차린 김밥과 미역국 등을 젊은이처럼 마음껏 들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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